책상머리에 유서 붙여 놓고 살기도…섬뜩한 저주 휩싸인 '한국 왕릉' 미스터리
2025-08-23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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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발굴의 아픈 기억, 저주의 진실은?
한국 역사계 최고이자 최악의 발굴로 불리는 무령왕릉 발굴은 저주와도 엮여 있어 여전히 많은 역사인들의 관심사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의 무덤으로 삼국시대에서 유일하게 피장자(무덤의 주인)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왕릉이다. 무덤 양식, 일본과의 교류, 문화재적 특징 등 백제 역사 연구에서 무령왕릉이 제공한 정보는 매우 중요하며, 이로 인해 무령왕릉 발굴은 한국 역사계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8일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군에서 6호분의 배수로 공사를 진행하던 중 우연히 발견됐다. 보존 상태가 훌륭했는데 이는 무덤이 통째로 지하에 있어 오랜 세월 도굴꾼의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부 묘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피장자의 신원도 확인할 수 있었다. 높은 보존율로 당시 역사계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부실한 발굴 현장은 무령왕릉을 망쳤고 이는 곧 '무령왕릉의 저주'라는 소문이 퍼진 계기이기도 했다.

당시 전문적인 고고학 교육을 받은 연구자가 부족했던 한국에서는 유물 관리, 현장 통제 등이 미흡했다. 오랜 기간을 거쳐야 할 발굴이었지만 발굴단은 17시간 만에 유물을 모두 수습해버렸다. 게다가 기자들도 사진을 찍기 위해 무령왕릉 내부까지 멋대로 들어와 문화재를 망쳤다.
당시 발굴단장 김원룡 박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몇 달이 걸렸어도 그 나무 뿌리들을 가위로 하나하나 잘라서 장신구들을 들어냈어야 했다. 고고학 발굴의 ABC가 미처 생각이 안 난 것이다"라며 무령왕릉 발굴을 두고 "무령왕릉 발굴은 내 삶의 가장 큰 수치이자 과오"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부에서는 무령왕릉의 저주가 왕릉을 함부로 대한 죄라고 말한다. 발굴과 관련된 인물들이 이후 좋지 않은 일을 연달아 겪었기 때문이다.

김원룡 박사는 빚에 몰려 집을 처분하기도 했고 남의 차를 빌어 타고 무령왕릉을 가던 도중 아이를 치는 사고도 있었다. 이 일로 인해 김원룡 단장은 아예 유서를 연구실 책상머리에 붙여 두었다는 후문이다. 게다가 고분의 금목걸이를 훔쳤던 연구원이 빚 때문에 파산하며 저주는 더욱 유명해졌다.
발굴 당일에는 입구를 파헤치는 순간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거나 바깥 공기로 내부 유물이 일시에 썩었다는 갖가지 소문도 돌았다.
무덤 발굴단이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무령왕릉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집트에서는 이른바 '파라오의 저주'라고도 불리는 '투탕카멘의 저주'로 무덤 발굴을 후원한 조지 허버트 경이 폐혈증으로 사망했다. 이어 당시 발굴에 엮인 여럿과 심지어 주변 가족도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발굴책임자 하워드 카터에게는 반려동물이 코브라에게 잡아먹히기도 했는데 코브라는 파라오를 상징하는 동물이라 화제를 모았다.

무령왕릉의 저주라는 소문은 사실 부실한 발굴과 보존에 대한 후대의 비판과 발굴 관계자들의 자책감이 만들어낸 것이다. 전문가들은 당시 발굴의 한계를 교훈 삼아 문화재 보존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