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네팔·동티모르 이어 필리핀서도... 분노한 Z세대, 나라 뒤집다

2025-09-22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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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에 도미노처럼 번지는 반정부 시위

필리핀 반정부 시위 모습. / KBS 뉴스 영상 캡처
필리핀 반정부 시위 모습. / KBS 뉴스 영상 캡처
특권층의 부패와 불평등에 반발한 반정부 시위가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도미노처럼 번지고 있다.

필리핀 정치권의 비리 의혹을 규탄한 시위대가 격렬한 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충돌해 49명이 체포됐다. 이번 시위는 최근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Z세대 주도 반정부 시위의 연장선이다. 인도네시아, 네팔, 동티모르에 이어 필리핀에서도 젊은 세대의 저항이 확산하고 있다.

22일(현지시각) AP통신 등에 따르면 전날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 있는 대통령궁 인근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했다. 전국적으로 수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대는 대통령궁으로 향하려 했다. 경찰이 차량으로 도로를 막자 돌멩이와 화염병을 던졌다.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며 진압했다. 일부 시위대는 둔기를 휘두르거나 타이어에 불을 지르는 등 몇 시간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70명가량이 다쳤다.

란둘프 투아뇨 국가경찰 대변인은 성인 36명과 미성년자 13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돌멩이를 투척하거나 방화를 저지르는 등의 혐의를 받는다.

마닐라 집회에 참석한 학생 운동가 알테아 트리니다드는 AP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가난에 허덕이면서 집과 미래를 잃어가는 동안 그들은 우리 세금으로 호화 차량과 해외여행을 누리며 막대한 부를 챙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필리핀 반정부 시위 모습. / KBS 뉴스 영상 캡처
필리핀 반정부 시위 모습. / KBS 뉴스 영상 캡처

전날 오전 대통령궁 인근 리살 공원 일대에서 시작한 시위에는 최소 3만3000명이 참여했다. 대부분은 평화롭게 집회를 진행했다. 필리핀 경찰은 시위가 끝난 뒤 사태가 통제됐다면서 앞으로도 시위 중 폭력 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시위의 직접적 계기는 홍수 방지 사업 부패 스캔들이다. 태풍 등으로 홍수 피해가 잦은 필리핀은 지난 3년 동안 9800건이 넘는 홍수 예방 사업에 약 5450억 필리핀페소(약 13조 2000억원)를 투입했다. 그러나 이 사업의 부패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2023년부터 올해까지 약 423억∼1185억 필리핀페소(약 1조300억∼2조88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지난주 상원에 출석한 한 건설회사 사주 부부는 충격적안 증언을 내놨다. 이들은 홍수 예방 공사와 관련해 마틴 로무알데스 하원의장을 포함한 하원의원 17명에게 뇌물을 줬다고 주장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의 사촌이자 실세인 로무알데스 하원의장은 결국 사임했다. 앞서 지난주에는 프랜시스 에스쿠데로 상원의장도 홍수 예방 사업 계약업체와 연관설이 제기된 여파로 교체됐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 7월 홍수 예방 사업을 직접 점검했다. 이달 들어서는 이 사업의 부패 가능성을 조사하고 책임자들을 형사 고발할 독립위원회를 구성했다.

필리핀 시위는 최근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는 Z세대 주도 반정부 시위의 연장선이다. 인도네시아, 네팔, 동티모르에 이어 필리핀까지 젊은 세대의 저항이 확산하고 있다. 이들 시위의 공통분모는 일자리 부족, 만연한 부패, 경제 불평등 확대에 분노한 젊은이들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지난 8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됐다. 하원의원 580명이 주택 수당으로 1인당 월 5000만 루피아(약 430만원)를 받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분노한 대학생과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는 자카르타 월 최저임금 540만 루피아(약 46만원)의 약 10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인도네시아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해 방화와 약탈이 벌어졌다. 경찰 장갑차에 깔려 숨진 오토바이 배달 기사를 포함해 10명이 숨지고 20명이 실종됐다. 정부와 의회는 논란이 된 국회의원 주택수당을 포함한 여러 특혜를 폐지했다. 스리 물야니 재무부 장관 등을 교체하는 내각 개편도 했다.

네팔에서는 이달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가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26개 소셜미디어 접속을 차단하면서 시작됐다. 네팔 정부는 가짜 뉴스 확산을 막는다며 당국에 등록하지 않은 SNS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젊은 층은 온라인 반부패 운동을 억누르려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네팔 시위는 폭동 수준으로 격화했다. 샤르마 올리 총리와 장관 4명이 사임했으나 시위대는 대통령 관저와 올리 총리 자택 등지에 불을 질렀다. 스누 프러서드 퍼우델 부총리 겸 재무부 장관은 수도 카트만두 거리에서 시위대에게 폭행당했다. 속옷만 입은 채 시위대 여러 명에게 팔다리가 들려 끌려다녔다. 지난 8~9일 이틀 동안 벌어진 시위로 경찰관 3명을 포함한 72명이 숨지고 2113명이 다쳤다.

동티모르에서도 대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의회가 국회의원 65명에게 도요타 새 스포츠유틸리티차(SUV)를 지급하기 위해 예산 420만 달러(약 58억2000만원)를 편성하자 반발이 발생했다. 대학생 2000명이 지난 15일부터 사흘 동안 수도 딜리에서 공공기관 건물을 파손하고 정부 차량에 불을 지르는 시위를 했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진압했다.

141만명이 사는 동티모르는 인구의 40%가량이 빈곤층이다. 불평등, 영양실조, 높은 실업률 등 사회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대학생 시위에 놀란 동티모르 의회는 국회의원에게 새 차량을 지급하기로 한 결정을 철회했다. 국회의원의 종신 연금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나라엔 공통점이 있다. 모두 개발도상국으로 뿌리 깊은 정치 계급이 존재하고 청년 실업률이 높다. 부패 수준도 심각하다. 젊은 세대는 성장 과실이 엘리트에게 돌아갈 뿐 자신들의 삶은 개선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청년실업률이 높은 편이다. 스리랑카가 22.3%, 네팔이 20.8%, 인도네시아가 13.1%에 이른다.

샤프카트 무니르 방글라데시 평화안보연구소 선임연구원은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 지역에서 Z세대가 정치 지도자들에게 '변화를 원한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세계적 시각을 가진 Z세대는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라면서 ”그들에게 인터넷은 단순한 소통 수단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생명의 피와 같아서 불길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아미시 라즈 물미 네팔 정치 평론가는 "국가는 여전히 일반 시민들에게 무관심했고, 총리와 정치 엘리트들은 자신들에게 도전할 누군가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마치 왕처럼 행동했다"고 지적했다.

아시아 지역의 젊은 층 시위는 과거에도 정권 교체를 이끌어낸 바 있다. 2022년 국가부도를 선언한 스리랑카에서는 엄청난 물가 상승과 생필품 부족으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고타바야 라자팍사 당시 대통령은 해외로 달아난 뒤 하야했다.

지난해 방글라데시에서는 '독재자'로 불린 셰이크 하시나 전 총리가 독립전쟁 유공자 후손에게 공직 30%를 할당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에 밀려 인도로 도피했다.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 소속 남아시아 전문가 크리스토프 자프렐로는 "아시아 일부 지역 청년층 불만은 주로 부패한 권위주의 정권 때문이지만, 사회경제적 좌절감도 반영한다. 실업으로 고통받는 빈곤한 청년과 부유층 사이의 불평등이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2010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반정부 시위와 정권 전복 시도가 잇따른 '아랍의 봄'이 15년 만에 아시아에서 재현될 가능성마저 제기된다. 최근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곳곳에서 특권층의 부패와 불평등에 반발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도미노처럼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home 채석원 기자 jdtimes@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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