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3500억달러 선불로 줘!” vs 한국 “연 150억달러도 벅찬데?”
2025-10-26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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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한국에 오면 3개월 끈 협상 타결되나

선불인가, 분납인가. 협상 타결의 골든타임이 다가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9~30일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한국을 방문하면서 한미 양국이 3개월간 끌어온 3500억달러 대미 투자 패키지 협상을 마무리할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여전히 양측의 간극은 크다. 전액 현금 선불을 고집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현실적 분납을 주장하는 한국 정부 사이에서 어떤 절충안이 나올지 귀추가 주목된다.
26일 외교·경제 관가에 따르면 한미 양국 정부는 트럼프 대통령 방한 시 3500억달러(약 504조원) 규모 대미 투자 펀드와 관련한 합의를 도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펀드는 지난 7월 31일 한미가 합의한 상호관세율 인하의 핵심 조건이다. 당시 양국은 한국 상품 전반에 적용되는 상호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추기로 했고, 대미 수출 1위 품목인 자동차에도 15% 관세를 적용하기로 했다.
문제는 펀드의 구성과 지급 방식을 두고 양국의 입장차가 3개월째 좁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액 직접 투자, 즉 선불 지급을 요구했다. 그는 지난달 15일 "한국이 3500억달러를 선불(up front)로 지급하기로 했다"고 재차 언급하며 압박을 가했다.
한국 정부는 선불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이 1년에 조달할 수 있는 금액이 최대 150억~200억달러 수준이라고 밝혔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3500억달러를 3년 내 집행할 경우 연평균 1167억달러의 자금 조달이 필요한데, 외환보유액 감소 없이 한국 정부와 민간이 연간 최대 확보할 수 있는 외화는 200억달러에 불과하다.
이에 한국 정부는 직접 투자와 대출·보증을 혼합하는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3500억달러 중 2000억달러는 현금으로 8~10년에 걸쳐 분할 납부하고, 나머지 1500억달러는 신용보증 등으로 충당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현금 투자 규모를 두고도 미국은 연 250억달러, 한국은 연 150억달러 이하를 제시하며 팽팽히 맞서는 것으로 전해진다.
협상이 각론에서 부딪히자 외환시장이 출렁였다. 7월 31일 타결 소식이 전해졌을 때 원·달러 환율은 1390원대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불을 요구한 9월 무렵 환율은 1410원대로 올랐고, 이후 협상 난항이 계속되자 장중 1440원대까지 치솟았다. 이 기간 3500억달러 펀드는 한화로 487조원에서 504조원으로 불어났다.
전문가들은 이번 트럼프 방한 중 양국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나마 합의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 아시아 순방길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협상이 "타결에 매우 가깝다(being finalized)"고 말했다.
한국 경제 규모상 3500억달러 일시 투자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미국 측도 어느 정도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20일 "미국이 전액 현금 투자를 요구하느냐"는 질문에 "거기까지는 아니다"라고 답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도 국정감사에서 "미국이 일시불 요구에서 한발 물러섰다"고 밝혔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22일 워싱턴DC에서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과 약 2시간 협의한 후 "남아 있는 쟁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며 "일부 진전이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협상이) 막바지 단계는 아니고, 협상이라는 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현재 최대 쟁점은 3500억달러 중 현금성 투자 규모와 납입 기간을 얼마나 길게 잡을지다. 세부적으로는 수익 분배 구조와 투자처 선정 시 한국의 개입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가에서는 협상이 결렬되면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정치적 명분이 없고, 한국 역시 또 다른 불확실성이 생기기 때문에 양측이 절충점을 찾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현금과 대출 보증 방식이 섞인 장기간 투자 방식으로 가닥을 잡되 투자 대상 의사 결정에 한국이 일정 부분 참여하는 방식이 유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경제 전문가들은 연간 150억~200억달러 규모 투자도 한국 돈으로 20조원이 넘는 수준이라며 국내 투자 재원 감소와 고용 악화 등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반면 협상이 지연되면 그 자체가 경제에 안 좋은 신호로 작용할 수 있고, 심지어 상호관세율을 25%보다 더 올릴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문제는 상호관세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타결돼도 품목별 관세 불확실성은 여전히 남는다는 점이다. 미국은 국가 안보상 수입을 제한할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철강과 알루미늄 등에 최대 50%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지난 7월 한국의 대미 철강 수출액은 2억8000만달러로 1년 전보다 26% 감소하는 등 이미 품목별 관세 피해를 보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철강이나 알루미늄을 사용해 만든 파생 제품 중 관세 부과 대상으로 추가할 품목 확대를 검토 중이다. 특히 미국이 한국의 주력 상품인 반도체에 품목별 관세를 높은 수준으로 부과한다면 대미 수출에 심대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반도체와 의약품에 대해 "한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나쁘게 대우받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동안 1기 때 약속을 번복한 트럼프 행정부의 전례를 보면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상무부는 반도체와 반도체 제조장비, 파생제품 수입이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8월 중 발표할 것이라는 예고는 아직 지켜지지 않고 있고, 트럼프 대통령은 반도체에 관세율 100%를 부과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핵심 투자를 특정하고 합의를 만든 뒤 항목별로 자금이 언제 들어올지에 대한 시간표를 두는 방식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나온다. 중국이 한화오션의 미국 자회사 5곳을 겨냥해 최근 단행한 제재가 무역협상의 변수로 작용할 수 있으며, 특히 조선 분야에서 한미 간 합의를 만들어내 중국에 맞대응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또한 3500억달러 투자 펀드와 관련한 세부 사항을 두고 다시 삐걱댈 우려도 있다. 일부라 해도 상당한 규모 현금을 지급해야 하는 상황으로 인해 환율이 상승하며 외환시장이 불안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외교·경제 전문가들은 최종적으로 문서화가 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며, 지난 한미정상회의 결과서에서도 봤듯이 문서화 이전엔 항상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품목별 관세 문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