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이런 피해는 처음” 농민들이 아예 수확 포기할 정도라는 '국민 식재료' 정체
2025-10-2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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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철 한 달 앞두고 전국 농가 비상
김장철을 한 달여 앞둔 시점에 전국 농가에 비상이 걸렸다. 길게 이어진 가을장마 탓에 작물 재배지 곳곳에서 세균성 병해가 번지면서 일부 농민들은 수확 자체를 포기하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비상이 걸린 이 국민 식재료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배추다.

27일 KBS는 가을배추 수확을 앞둔 강원도의 한 배추밭을 찾아 현장 상황을 전했다. 수확 시기가 코앞인데도 밭 곳곳에서 누렇게 시든 배추가 눈에 띄었다. 속이 단단하게 차올라야 할 시기인데 뿌리는 허옇게 드러난 채 밭에 나뒹굴고 있었다. 세균 감염으로 조직이 썩어 들어가는 배추 무름병이 원인이었다.
배추 재배 농민 김재중 씨는 배추밭을 바라보며 자포자기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KBS에 "그냥 갈아엎어야지 뭐 방법이 없다. 전부 다 자포자기 상태"라고 토로했다. 병에 걸리지 않은 배추마저 제대로 성장하지 못해 상품 가치를 잃은 상태였다.
다른 재배 농민 김익중 씨 역시 피해 규모를 전하며 "어떤 밭은 거의 70~80% 피해를 봤고, 바닥이 아주 물컹물컹할 정도로 돼 있기 때문에 배추가 크질 못하고 이렇게 다 썩음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9~10월 30일 가까이 비…6년 중 강수일수 최다
이번 피해의 직접적 원인은 이례적인 가을장마 때문이었다. 배추가 자라는 핵심 시기인 9월과 10월, 강원 영서지방에는 30일 가까이 비가 내렸다. 전남 해남의 경우 올해 9~10월 강수일수가 29일로 최근 6년 사이 가장 많았다. 지난해 같은 기간 강수일수가 21일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거의 2배 가까이 늘어난 셈이다.
강수량 자체는 올해 297.7mm로 지난해 454.9mm보다 적었지만, 땅이 마를 사이 없이 지속적으로 비가 내린 것이 화근이었다. 가을장마 이후에 다습한 환경이 조성되면서 무름병이 퍼져나갔고, 강원도내 10~20%의 배추 농가가 피해를 보고 있는 상황이다.
올해 9월 평균 기온은 23.5도로 평년보다 1.7도 높았고, 강수일수는 19일로 지난해보다 9일 많았다. 고온 다습한 환경이 계속되면서 세균성 병해인 배추 무름병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전국 최대 산지 해남도 비상…"50% 수확 못할 듯"
전국 가을 배추의 25%, 겨울 배추의 65%를 책임지는 최대 주산지 해남도 예외가 아니었다.
30년 넘게 배추농사를 지어온 김효수 씨는 KBC와 인터뷰에서 "이런 피해는 처음"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배추) 뿌리가 없다. 썩어버려 가지고... 육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피해가 심하다. 저희 같은 경우는 50%도 수확을 못할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김영동 해남군 절임배추 생산자협회장은 "9월 계속 비가 내리고, 날이 흐렸다. 배추 뿌리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겉 잎만 자라게 된 거다. 또 흐린 날이 많다 보니까 병이 창궐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라남도는 해남의 배추 재배면적 5000여ha 중 3%인 150ha에서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현장 농민들이 체감하는 피해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큰 상황이다.
충북 괴산 223ha 농업재해 지정…전국적 피해 확산
피해는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충북 괴산군은 9~10월 잦은 강우로 발생한 가을배추와 콩 피해가 농림축산식품부로부터 농업재해로 공식 인정받았다고 27일 밝혔다.
군의 긴급 현장 조사 결과 10월 23일 기준 가을배추 165ha, 콩 58ha 등 총 223ha에서 농작물 피해가 확인됐다. 불정면과 청천면 등 저지대 재배단지에서 잦은 호우로 작물 생육 부진과 병해 발생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군은 11월 3일까지 피해 농가를 대상으로 정밀 피해 조사를 진행하고, 이후 재난지원금 지급과 복구 지원을 본격 추진할 계획이다. 송인헌 군수는 "기상이변이 상시화된 상황에서 농업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김장 수급 불안정 현실화…출하량 30-40% 감소 전망
문제는 전국적 파급력이다. 2~3주 뒤면 본격적인 수확이 시작될 해남 배추의 부진은 서울 등 대도시의 김장 성수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전국배추생산자협회는 지난 22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9~10월 잦은 비로 밭이 진흙탕이 돼 트랙터도 들어가지 못했다"며 "결구기에 비가 이어지면서 병해와 도복 피해가 속출했다"고 호소했다. 협회는 "주요 산지의 출하량이 평년 대비 30~40%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며 "올해 배추가격 급등은 잦은 비로 인한 생산 차질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강조했다.
배추는 9월 생육기와 10월 수확기를 거치며 결구가 형성된다. 이 시기에 잦은 비는 밭을 포화 상태로 만들어 배추의 뿌리 호흡을 막고, 배추 내부에 수분을 과도하게 축적시켜 무름병 발생을 촉진시킨다. 무름병은 잎과 뿌리가 썩어 물러지는 세균성 병으로, 수확 직전까지 진행돼 피해를 막기 어렵다.
농촌진흥청 관계자는 "기상이 평년보다 더 나빠 배추 수확이 지난해보다 힘든 것으로 파악됐다"며 "배추는 9월이 생육의 핵심, 10월이 수확기이기 때문에 이 시점의 기상이 결정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9~10월 잦은 강우로 배추밭 과습이 이어지며 병해 발생이 늘고 있다"며 배수로 등을 정비해 물빠짐 관리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이상 기후에 치솟는 배추값...정부도 대책 마련 나서
올해는 유독 배추값이 치솟고 있다. 지난 8월에도 배추 한 포기가 7000원까지 올랐다. 폭염과 폭우가 반복적으로 교차하는 이상기후가 가격을 폭등시켰다. 당시 정부는 배추값 안정을 위해 정부 비축물량을 방출하고 고랭지 배추 출하를 서둘러 소매가를 안정시켰다.
그런데 김장 수요가 폭증하는 가을배추마저 이상기후로 인한 생산량 급감으로 가격이 크게 오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지난해에도 가을배추가 9월 폭우로 재배면적이 크게 줄면서 가격이 뛰었지만, 올해는 10월 수확기에 잦은 비로 무름병이 발생해 지난해보다 시장 여파가 더 클 것으로 보인다.
농진청 관계자는 "최근들어 하나의 요인이 아닌 전체적인 기상 여건이 변하고 있어 피해가 커지고 있다"며 "특히 가을철 잦은 비와 낮은 일조량이 배추 생육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김장철 수급 불안정에 대비해 비축 물량을 확보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선 상태다. 송미령 농식품부 장관은 지난 26일 배추 작황을 점검한 뒤 "10월 마지막주부터는 기온이 크게 떨어질 것으로 전망돼 대비가 필요하다"며 "이상기상에 대응해 생육 관리 지원을 강화해 농민이 김장배추를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관계기관은 적극 협조해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