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가장 유명했던 '문화재급 호텔'이 철거되고 있다

2025-10-27 14:46

add remove print link

한국 현대 건축사 중요 페이지를 차지하는 바로 그 건축물

밀레니엄 힐튼서울 / 카카오맵
밀레니엄 힐튼서울 / 카카오맵

서울 남산 밑 한 건물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 가림막 너머 중장비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40년간 그 자리를 지켜온 구조물을 한 조각씩 해체하고 있다. 밀레니엄 힐튼서울. 1983년 문을 연 이후 이곳은 한국과 세계가 교차하는 지점이었다. 국제회의가 열렸고, 역사적 협상이 오갔으며, 수많은 사람의 특별한 순간이 새겨졌다. 그 모든 장면이 지금 먼지와 함께 흩어지고 있다.

전후 1세대 건축가 김종성의 손에서 태어난 이 건물은 한국 현대 건축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김종성은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 밑에서 일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그가 설계한 힐튼서울은 지하·지상 25층, 연면적 8만2856㎡, 객실 684실 규모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건축물이었다.

특히 아파트 6층 높이만 한 대형 아트리움은 국내 건축 기술로는 처음 시도된 구조였다. 미스의 대표작들과 비교해도 98% 수준의 완성도를 보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김종성 스스로 28년 서울건축 재직 기간 중 최고작으로 꼽을 만큼 공들인 작품이었다.

건물 설계 과정도 남다랐다. 대우그룹 회장인 김우중이 미국까지 찾아가 김종성에게 설계를 요청했고, 김종성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일리노이공대 교수직을 그만두고 귀국했다. 처음 계획한 일자형 구조는 남산과 따로 노는 느낌이 들어 30도씩 각도를 틀어 남산을 향하도록 바꿨다. 김종성의 표현을 빌리면 "남산과 대화하는" 형태였다.

힐튼서울은 한국 현대사의 여러 순간을 목격했다.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 총회가 열렸고,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 관련 행사가 진행됐다. 1987년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 지명식, 1997년 김대중·김종필의 DJP 연합 협상, 1992년 찰스 왕세자(현 국왕) 방한 행사까지 굵직한 일들이 이곳에서 펼쳐졌다.

그러나 세월은 이 건물을 비껴가지 않았다. 1999년 외환위기로 대우개발에서 CDL호텔코리아로 주인이 바뀌었다. 코로나19는 결정타였다. 호텔 산업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경영난을 버티지 못했다. 2021년 이지스자산운용에 매각이 결정됐고, 2022년 12월 31일 마지막 손님을 배웅했다.

지난 1월 서울시는 이 부지에 지하 10층·지상 39층 업무시설과 지하 4층·지상 8층 공공청사를 짓는 계획을 인가했다. 2월 현대건설이 1조1878억원 규모로 철거와 개발 공사를 수주했다. 애플·블룸버그 본사를 설계한 포스터+파트너스가 새 건물 설계를 맡았다. 철거는 5월부터 2년 예정이며 2031년 준공 목표다.

밀레니엄 힐튼서울 / 연합뉴스
밀레니엄 힐튼서울 / 연합뉴스

철거가 예정된 이유는 명확했다. 현재 용적률 350%인 이 땅은 허용 용적률 600%. 완화 시 800%까지 가능하다. 개발 수익성 앞에서 건축사적 가치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건축계는 반발했다. 한국건축역사학회는 "힐튼서울은 한국 현대사의 증거물"이라며 "보존 없는 철거는 도시 정체성 훼손"이라는 성명을 냈다. 하지만 철거 작업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그래도 기록은 남기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지스자산운용은 건물 내외부와 로비, 주요 건축 요소의 고해상도 3D 데이터를 확보해 서울시에 기증했다. 이 자료는 향후 도시 계획과 건축 연구에 쓰일 예정이다.

지난달 25일부터 내년 1월 4일까지 남산 피크닉에서 '힐튼서울 자서전' 전시가 열린다. 건축 큐레이팅 그룹 CAC가 기획한 이 전시는 건물의 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돌아본다. 초기 도면, 수정된 계획안들, 관계자들의 서신, 사진, 인터뷰 등이 전시됐다. 철거 현장에서 가져온 건축 재료와 소품들도 있다. 김종성을 비롯한 참여 작가들이 각자 방식으로 힐튼서울을 기억한다.

호텔 폐업 후 방치됐던 크리스마스 자선열차도 복원해 전시장에서 운행 중이다. 관객들에게 받은 힐튼서울 관련 사연들도 함께 전시했다.

건물 하나가 사라지는 게 왜 중요한가. 40년간 그곳에 쌓인 시간과 기억, 사람들의 경험도 함께 지워지기 때문이다. 힐튼서울 철거는 개발과 보존 사이에서 한국 사회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home 채석원 기자 jdtimes@wikitree.co.kr

NewsCh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