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해적 깃발' 아래 모여 정부까지 뒤엎은 Z세대의 혁명

2025-10-2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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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아프리카·유럽을 넘나드는 청년 시위의 새로운 상징

'원피스' 밀짚모자 해적단  깃발이 Z세대 시위의 상징이 됐다. / 'Kitsune Anime' 유튜브
'원피스' 밀짚모자 해적단 깃발이 Z세대 시위의 상징이 됐다. / 'Kitsune Anime' 유튜브

밀짚모자를 쓴 해골 문양이 찍힌 깃발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국회의사당 앞에서 펄럭였다. 네팔 카트만두의 총리 관저를 불태우는 시위대 손에도 같은 깃발이 들려 있었다. 마다가스카르 안타나나리보의 거리에도, 모로코의 청년 시위 현장에도 동일 문양이 등장했다. 이 기묘한 깃발의 정체는 1997년부터 연재되고 있는 일본 만화 '원피스'에 등장하는 밀짚모자 해적단의 깃발이다. 30년 가까이 된 만화 속 상징이 2025년 전 세계 Z세대 시위의 공통 언어가 됐다.

Z세대 시위 현장에서 보이는 '원피스' 밀짚모자 해적단 깃발. / MBC
Z세대 시위 현장에서 보이는 '원피스' 밀짚모자 해적단 깃발. / MBC

시작은 인도네시아였다. 2025년 8월 25일(이하 현지시각) 자카르타 국회의사당 앞에 수천 명의 청년이 모였다. 이들이 분노한 이유는 명확했다.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에게 월 5000만 루피아(약 410만 원)의 주택수당을 배정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이는 자카르타 최저임금의 10배, 지방 최저임금의 20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식료품비와 교육비는 치솟고 대규모 해고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국회의원들이 챙긴 특권에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시위대는 검은 옷을 입고 돌과 폭죽을 던지며 국회 진입을 시도했다.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로 대응했고, 8월 28일에는 경찰 장갑차가 21세 오토바이 택시 기사 아판 쿠르니아완을 치어 사망하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배달 주문을 수행하던 중이었던 그의 죽음은 영상으로 확산됐고, 시위는 더욱 격화됐다. 마카사르와 수라바야에서는 정부 건물들이 불타올랐고, 국회의원들의 집이 약탈당했다. 인도네시아 당국은 깃발을 드는 행위가 반역죄에 해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국제앰네스티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성명을 냈다. 결국 8월 31일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은 국회의원 수당을 폐지하고 해외 출장을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9월에는 재무장관을 포함해 5명의 장관을 경질했다.

깃발은 히말라야를 넘었다. 9월 4일 네팔 정부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왓츠앱, X 등 26개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차단했다. 정부 등록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것이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고위층 자녀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상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되며 부패 의혹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루이비통과 까르티에 상자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든 장관 아들의 사진이 대표적이었다. 이른바 '네포 키즈' 캠페인은 청년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여러 매체가 밀짚모자 해적단의 깃발이 Z세대 시위의 상징이 된 이유를 분석했다. / 'BBC World Service' 유튜브

9월 8일 수천 명의 청년이 카트만두 국회의사당 앞에 모였다. 경찰은 물대포와 최루탄으로 대응했지만, 시위대가 철조망을 뚫고 진입하려 하자 실탄을 발사했다. 하루 만에 19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분노한 시위대는 국회의사당, 대법원, 총리 관저에 불을 질렀다. 최대 정당인 네팔리 콩그레스(네팔의회당) 당수 셰르 바하두르 데우바, 람 찬드라 파우델 대통령, 라메시 레카크 내무장관, 공산당 지도자 푸시파 카말 다할의 집이 모두 불탔다. 외무장관 부인이 소유한 사립학교도 방화됐다. 카드가 프라사드올리 총리가 결국 사임했다. 소셜미디어 차단은 해제됐지만 시위는 계속됐고, 군부는 전국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9월 22일까지 74명이 사망하고 2113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깃발은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물과 전기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는 상황이 지속됐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만이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고, 정전은 하루 8시간 이상 이어졌다. 수도 안타나나리보 주민들은 6년간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지만 여전히 요금을 냈다. 정부는 1억5200만 달러를 들여 13km 케이블카 건설에 투자했다. 안드리 라조엘리나 대통령은 에펠탑도 초기에 비판받았다며 옹호했다.

9월 25일부터 'Z세대 마다가스카르'로 불리는 청년 단체가 시위를 주도했다. 페이스북 페이지는 5일 만에 10만 명 이상의 팔로워를 모았다. 로고는 '원피스'에서 영감을 받았으되, 밀짚모자를 마다가스카르식 모자로 바꿨다. 2009년 라조엘리나를 권좌에 올렸던 엘리트 군부대 캡샛(CAPSAT)이 지난 11일 시위대 편에 섰다. 마이클 란드리아니리나 대령은 시위대에게 발포 명령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라조엘리나는 프랑스 군용기로 레위니옹 섬을 거쳐 두바이로 도피했다. 지난 14일 의회는 130대 1로 대통령 탄핵을 가결했다. 군부는 권력을 장악했다. 유안토니우 구테흐스 엔 사무총장은 헌정 질서로의 복귀를 촉구했지만, 17일 란드리아니리나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원피스' 밀짚모자 해적단 깃발
'원피스' 밀짚모자 해적단 깃발

깃발은 계속 퍼졌다. 모로코에서는 디스코드 서버 'GenZ 212'가 지난 2일까지 회원 수 3000명에서 15만 명으로 급증했다. 의료 서비스에 항의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페루 리마에서는 연금 개혁과 부패 스캔들에 반대하는 'Z세대 행진'이 일어났다. 슬로바키아, 로마, 뉴욕, 파리의 시위 현장에서도 밀짚모자 해적 깃발이 목격됐다. 9월 26일 뉴욕 유엔본부 밖 시위에서도 누군가 깃발을 착용하고 있었다.

'원피스'는 1997년 첫 연재를 시작해 단일 작가 만화 시리즈 최다 발행 부수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5억 부 이상 판매됐고, 40개 언어로 번역됐으며, 애니메이션, 영화, 카드게임, 비디오게임, 넷플릭스 실사판으로 제작됐다. 주인공 몽키 D. 루피는 해적왕을 꿈꾸며 밀짚모자 해적단을 이끌고 세계정부의 독재에 맞서 싸운다. 노예제,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와 맞서는 이야기는 국경을 넘어 공감을 얻었다.

레이나 데니슨 브리스톨대학교 교수는 "'원피스'가 만들어낸 공유된 하위문화 언어"가 시위의 확산을 도왔다고 분석했다. 트리니티대학 이즈미 카츠야 교수는 "소수자이고, 소외되고, 사회에서 오해받는 애니메이션 주인공들과 청년들이 자신을 동일시한다"고 설명했다. 네팔의 한 23세 시위 참가자는 "밀짚모자 해적단은 자유와 해방을 상징한다. 부당한 권위에 맞서야 한다는 정신이 나를 고무시켰다"고 말했다. 마다가스카르의 25세 시위 참가자도 '원피스' 팬이었다.

누리안티 잘리 오클라호마주립대학교 교수는 "정부에 의해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고 느끼고, 불공정한 시스템에 갇혔다고 느끼는 젊은이들이 즉시 자신을 그 이야기에서 인식한다"고 말했다. CNN에 따르면 앤 호르빈스키 트리니티 칼리지 교수는 "루피는 매우 결단력이 있다. 그와 그의 선원들은 좌절을 겪었지만 계속 추구했다. 그것이 사람들이 반응하고 깃발을 시위에 가져올 때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깃발의 효과는 모호성에서 나온다. 정당 로고처럼 명확한 정체성을 갖지 않는다. 대중문화에서 유래했기에 정부가 억압하기 어렵다. 억압하면 권위주의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오클라호마주립대학교 잘리 교수는 "상징은 말로 표현하지 않고도 사람들이 말하려는 것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브라운대학교 헨리 젠킨스 교수는 "이것은 중요한 상징이고, 문화 내에서 활동하며, 재미있는 정체성"이라며 "학생들이 불만을 소통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참여 정치의 기반이 되는 것의 일부"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연좌농성, 행진, 단식투쟁 같은 전술이 국경을 넘어 전파됐다. 지금은 상징, 즉 글로벌 문화의 시각적 참조가 가장 빠르게 순환한다. 지역적 투쟁에 적용될 수 있으면서도 다른 곳에서 즉시 인식 가능한 상징이다. 오늘날 젊은 활동가들에게 문화와 정치는 분리되지 않는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밈, 상징, 문화적 참조를 통해 불만을 표현하며, 이는 쉽게 국경을 넘는다.

Z세대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세대다. 이들은 2008년 금융위기와 그 여파를 경험하며 성장했다. 네팔의 청년 실업률은 2022-23년 20% 이상으로, 남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GDP의 3분의 1이 해외 송금으로 충당된다. 마다가스카르는 2022년 인구의 75%가 빈곤선 이하에서 살았다. 인도네시아의 배달 기사들은 낮은 임금과 사회적 주변화를 겪는 긱 이코노미의 상징이다.

정치적 불안정도 깊다. 네팔은 2008년부터 2025년 9월까지 8명의 총리 아래 14개 정부가 교체됐고, 어떤 정부도 5년 임기를 완수하지 못했다. 올리, 다할, 데우바 세 지도자가 총리직을 돌아가며 맡았지만 모두 부패와 정실주의 의혹에 시달렸다. 마다가스카르의 라조엘리나는 2009년 쿠데타로 집권했다가 2014년 퇴진했고, 2018년과 2023년 선거로 재집권했지만 2023년 선거는 야당의 대규모 보이콧을 받았다.

포춘지에 따르면 잘리 오클라호마주립대 교수는 "자카르타, 카트만두, 마닐라의 시위대가 '원피스' 해적 깃발을 흔들 때 그들은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 아이콘을 살아있는 저항의 상징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일부 시위대는 국기가 "부패한 시스템에서 휘날리기에 너무 신성하다"고 주장하며 해적 깃발을 환멸의 표현으로 사용했다.

여러 매체가 밀짚모자 해적단의 깃발이 Z세대 시위의 상징이 된 이유를 분석했다. / 'Warfronts' 유튜브

CNN에 따르면 네팔 공공정책 분석가 비나이 미슈라는 "총리가 사임하면 대통령이 의회를 소집해 정부를 구성한다"며 "명확한 과반수를 가진 정당이 없기 때문에 의원들은 Z세대 조직의 일부가 참여하는 논의와 함께 과도 정부를 구성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9월 12일 네팔 대법원장을 역임한 수실라 카르키가 과도 총리로 취임했다. 네팔 최초의 여성 총리였다.

이 현상은 '아시아의 봄'으로 불렸다. 르몽드는 2022년 스리랑카의 아라갈라야 시위를 기점으로 시작됐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케냐 재정법안 항의 시위도 청년이 주도했고, 2025년 네팔 정부 전복 이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했다. 방글라데시와 네팔의 시위는 정부 전복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불평등, 생활수준 하락, 부패, 민주주의 후퇴, 권위주의에 대한 대응이 공통적 원인이다. 소셜미디어는 행동주의와 조직화의 공통 도구다. 하지만 각국 정부는 이를 억압하려 했다. 네팔은 26개 플랫폼을 차단했고, 인도네시아는 틱톡 라이브스트리밍을 며칠간 중단했다. 그러나 VPN 서비스 가입자는 급증했고, 시위는 더 격화했다.

가디언에 따르면 깃발의 의미는 "국경을 넘어 공명했고, Z세대 시위대에게 저항과 희망의 상징"이 됐다. 더위크는 "Z세대가 저항의 문화적 어휘를 재구성하는 방법의 예"라고 평가했다. 루피가 마법의 열매를 먹고 신체적 한계를 넘어 늘어나는 능력은 "회복력의 강력한 은유"가 됐다. 불가능한 역경에 맞서 자유를 향한 흔들리지 않는 추구는 "부패, 불평등, 권위주의적 과잉으로 표시된 정치 세계를 헤쳐나가는 오늘날 청년들과 공명한다."

CBC에 따르면 브리타 팡 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는 "정부 항의에 대한 아이디어와 사람들이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이 변화하고 있다"며 "인도네시아의 경우 이미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진 잘 연결된 '원피스' 팬층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녀의 연구는 "견인력을 얻는 정치 운동이 사람들이 이미 하고 있고 소비하고 있는 것에서 가장 자주 발생한다"고 시사한다. "이 경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팬 커뮤니티가 더 정치적인 것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세대에게 또 다른 충격이었다. 교육과 고용 기회가 제한됐고,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됐다. 동시에 소셜미디어 사용은 더욱 확대됐다. 틱톡과 인스타그램, 유튜브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정보 공유와 조직화의 도구가 됐다. 디스코드는 네팔과 모로코 시위에서 조직화 플랫폼으로 사용됐다. 네팔에서는 과도 총리 선출도 온라인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 현상은 우려도 낳는다. 정치 지도자가 없는 운동은 기회주의자와 강경파에 취약하다. 마다가스카르의 'Z세대 마다가스카르' 지도부는 "군부가 시위의 혼란을 틈타 권력을 장악해버렸다며 운동이 본래 취지를 잃고 군사 쿠데타의 명분으로 이용당했다“고 밝혔다.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것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였다. 유엔과 아프리카연합은 헌정 질서로의 복귀를 촉구했지만 군사 쿠데타가 이뤄지고 말았다.

네팔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네팔 군부는 역사적으로 직접적인 정치 개입을 자제해왔다. 그러나 9월 시위 과정에서 군부는 올리 총리에게 "당신의 정치 생명은 우리 손에 달렸다"는 메시지를 은밀히 전달하면서도 겉으로는 통치자가 아닌 중립적 중재자로 행세했다. 군은 9월 10일 전국 통행금지령을 선포하며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개입했고, 최종적으로 과도 총리 선출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깃발은 여전히 퍼지고 있다. 필리핀의 반부패 시위, 모로코의 의료 서비스 항의, 페루의 연금 개혁 반대 시위에서 계속 목격된다. 프랑스와 슬로바키아에도 도달했다. 만화와 밈을 공유하고 SNS로 실시간 소통하는 청년들의 문화 코드가 시위와 혁명마저 기성 정치 언어 대신 문화로 풀어내는 현상을 만들어냈다. 억압과 부패에 맞서고 자유를 꿈꾸는 만화 속 해적단의 깃발이 2025년 전 세계 Z세대의 깃발이 됐다.

home 채석원 기자 jdtimes@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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