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마감 닥쳐서야 일 시작하는 사람, 알고 보니 게으른 게 아니었다
2025-11-0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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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직전 폭발력의 비밀... 이 질환과 도파민 보상 체계의 과학
"마감이 다가와서 긴급성이 생겼을 때만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ADHD를 가진 사람들이 끝까지 일을 미루는 이유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다.

유튜브 채널 '뇌부자들'이 최근 'ADHD가 일을 미룰 수 밖에 없는 과학적인 이유'란 제목의 영상을 게재했다. 뇌부자들은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정신과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의 모임이다.
영상에서는 ADHD를 가진 사람들이 마감까지 일을 미루는 이유를 뇌과학적으로 분석했다. 일에 착수할 때는 동기 부여와 보상 예측 과정이 필요한데, ADHD를 가진 사람들은 도파민 보상 체계가 약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을 봐도 보상 예측도 잘 안 되고 동기 부여도 잘 안 돼 일에 착수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보상은 즉각적 보상과 지연된 보상으로 나뉜다. 일반적으로는 지금 힘들어도 나중에 보상이 온다는 것을 생각하며 인내하며 버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전전두엽이다. ADHD를 가진 사람들은 전전두엽의 역할이 저하돼 있어 지연된 보상에는 둔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즉각적이고 강렬하게 지금 바로 주어지는 보상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당장 재미있고 자극적인 게임이나 SNS, 영상 등을 선택하게 되고, 마감이 다가와서 긴급성이 생겼을 때만 강렬한 자극을 바탕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마시멜로 테스트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5분 기다리면 두 개를 더 준다고 했을 때 ADHD를 가진 아이들은 참지 않고 일단 먹어버리는 경향성이 더 강하다. 당장 기다려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때 오는 성취를 선택하기보다 당장 눈앞의 즐거움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ADHD를 가진 사람들은 우선순위를 세우고 계획하고 실행하는 전전두엽의 기능이 약하다. 무엇이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세우기도 어렵고 계획 세우는 것도 어렵고, 그러다 보니 실행하는 것까지 어려워져서 결국 미루게 된다.
시간 감각의 문제도 있다. ADHD 환자들은 시간이 흐르는 흐름을 알아차리기 어렵고 과업을 할 때 걸리는 시간을 예측하는 부분에 문제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거 하나만 모드'다. 회의 10분 전에 출력 버튼을 누르고 출력물을 정리해서 가져가면 딱 맞는 시간인데, ADHD가 있는 사람들은 시간 예측 시스템에 어려움이 있어 '이메일 하나쯤은 써도 되겠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다른 일을 중간에 끼워 넣다 보니 결국 마감을 지키지 못하고 넘기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반대로 '기다림 모드'도 존재한다.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고 실수가 반복되다 보면 중요한 일을 앞두고 이를 놓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극대화된다. 중요한 업무가 있는 날에는 다른 것들을 일체 하지 않으려는 형태로 나타난다. 앞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도 이 일을 하다 보면 뒤에 있는 더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아예 시동조차 걸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그날 해야 할 업무는 자연스럽게 밀릴 수밖에 없고 업무 효율은 떨어지게 된다.
과집중과 과몰입도 시간을 지나치게 만드는 원인이다. 한번 일을 시작하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정도로 집중한다. 이 시간 동안 많은 성취를 이뤄내기도 하지만 시간 조절을 못 해서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대신 늦게 시작했는데도 어느 정도 결과물이 괜찮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도 ADHD의 특징이다. 업무 능력이나 효율 측면에서 기복이 있다고 표현할 수 있다.
ADHD를 가진 사람들은 번아웃에 특히 잘 빠진다. 첫 번째 이유는 뇌의 에너지 문제다. ADHD가 있는 사람들의 뇌는 집중 유지, 주의 전환, 충동 억제 과정을 담당하는 전전두엽의 기능이 약하다. 똑같은 업무, 똑같은 처리 과정을 거치면서도 남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더 많은 자원을 끌어다 써야 한다. 그렇기에 더 쉽게 소모되고 지친다.
두 번째 이유는 과몰입 때문이다. 과몰입을 하다 보면 많은 욕구를 무시하게 된다. 화장실도 안 가고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는다. 수면이나 에너지 섭취에 문제가 생기다 보면 결국 번아웃에 빠질 수 있다.
세 번째 이유는 완벽주의다. ADHD가 있는 사람들 중에 완벽주의적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유년기부터 실수를 자주 하다 보니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경우가 많고, 그때 느낀 강렬한 수치심이 '다시는 이런 감정을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강박적이고 완벽주의적인 내적 기준으로 형성된다. 이런 완벽주의가 업무에 득이 되기도 하지만 시간이나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게 된다. 집착적으로 반복적으로 확인하다 보니 업무가 효율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제 시간에 끝내기 어렵다.
번아웃 관리를 위해서는 자신의 에너지 상태를 스스로 체크해서 어떤 상태에 있는지 상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ADHD를 가진 사람들은 과집중, 과몰입 상태를 경험하기 때문에 에너지 수준이 상당히 높은 고양된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도 휴식을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 과몰입 상태에서도 육체는 계속 돌아가고 있고, 육체가 지치지 않도록 생리적 욕구를 만족시켜야 한다. 자야 할 때 자고 먹어야 할 때 먹고 화장실에 가야 할 때 가는 기본적인 루틴을 놓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에너지 단계에서 빠져나오는 방법도 있다. ADHD를 가진 사람들이 저에너지에 빠지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과도한 자극이다. 자극이 너무 많아 이것들을 처리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감각을 차단하거나 줄일 수 있는 감각의 휴식이 도움이 된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거나 반신욕, 마사지 등이 좋은 방법이다.
두 번째는 과소 자극으로 인한 저에너지 상태다. ADHD를 가진 사람들에게 과소 자극 상태는 굉장히 불쾌한 감각을 유발할 수 있다. 뇌가 충분한 자극을 받지 않을 때 느끼는 극심한 지루함, 무기력감을 말한다. 이런 상태에서 ADHD가 있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피로감을 크게 느낀다. 굉장히 따분하게 보낸 날 더 지치고 피곤하고 찌뿌둥하고 불쾌한 느낌을 겪는다면 과소 자극으로 인한 피로감이다.
일할 때도 이런 과소 자극 때문에 힘들 수 있다. 편하고 단순하고 쉬운 일이 ADHD를 가진 사람에게는 오히려 번아웃을 유발할 수도 있다. 약간 더 어렵고 도전할 수 있고 새롭고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일들이 번아웃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한다. 과소 자극 상태로 인한 저에너지에서는 뇌에서 적당한 도파민을 끌어올릴 수 있는 액티비티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클라이밍이나 러닝 같은 몸을 움직이는 액티비티, 새로운 곳에 가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등이 해당한다. 무조건 휴식이라고 해서 집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은 독이 될 수도 있다.
영상에서는 책 '나는 내가 고장 난 줄 알았다'도 소개됐다. ADHD인이 ADHD인을 위해 쓴 책으로, 메디스 카더라는 작가가 딸의 신경심리 검사를 하던 중 딸의 대답이 자신과 똑같다는 것을 알게 돼 본인도 ADHD라는 것을 발견했다. 현재 ADHD 코치로 지내면서 본인의 경험과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다룬 책이다. 실용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고 전통적인 의학 개념에서 보지 않았던 새로운 관점들이 제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