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멸종한 줄 알았는데... 야산서 우연히 뿌리 발견해 대량재배 중인 작물

2025-11-0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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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의 쌉쌀한 풍미 내는 핵심 원료인 그 작물

토종 홉 / EBS
토종 홉 / EBS

강원도 홍천의 한 숲속 농장에서 43년 차 농부가 사라졌던 토종 홉을 복원해 맥주 원료 산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이 농부는 농업에 감성을 더한다는 철학으로 농토에 자작나무를 심고 그 아래에서 토종 식물과 홉을 함께 재배하며 숲 농장 형태의 생태적 농업을 실천 중이다. 최근 EBS가 방송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이 알려졌다.

토종 홉 / EBS
토종 홉 / EBS

다큐멘터리 주인공 연충흠 씨가 키우는 솔방울 모양의 식물 홉은 맥주의 향과 쌉쌀한 풍미를 내는 핵심 원료다. 홍천 지역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연간 50톤 이상의 홉을 생산하던 국내 주요 산지였다. 그러나 외국산 홉이 대량 수입되면서 지역 재배는 급격히 사라졌고, 농가들도 하나둘 홉을 포기했다. 연 씨는 사라진 토종 홉의 뿌리를 야산에서 발견하고 이를 다시 재배해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연씨가 복원한 홉은 노란색 꽃가루 ‘루플린’을 품고 있다. 루플린은 맥주의 쌉쌀한 맛과 향, 거품의 안정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성분으로 알려져 있다. 맥주 한 잔의 풍미를 좌우하는 물질이 바로 이 작은 홉꽃 속에 존재한다. 연 씨는 홉을 수확할 때마다 꽃가루를 직접 손으로 확인하며 품질을 점검한다. 수확은 여름철에 이뤄지는데, 하단의 줄기는 월동을 위해 남기고 상단의 꽃송이만 따낸다.

홍천에는 현재 연 씨를 포함한 아홉 농가가 토종 홉을 다시 재배하고 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이어진 그의 연구와 시도 끝에 형성된 작은 공동체다. 홉은 덩굴성 식물로 관리가 까다롭지만, 연 씨는 기계화 작업을 도입해 효율을 높였다. 과거에는 손으로 하나씩 따야 했던 수확 과정을 줄기 분리 기계를 통해 처리하면서 생산성을 개선했다. 그는 “농사는 손끝에서 완성된다”는 말을 반복하며 새로운 재배 방식을 끊임없이 시험해 왔다.

연 씨의 농장은 귀농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도 교육의 장으로 열려 있다. 일주일에 두 번 농사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예비 농부들이 직접 토종 홉 재배 과정을 배우고 있다. 참가자들은 파종에서 수확까지 전 과정을 함께하며, 기계 운용법과 수확 후 건조 및 저장법 등 실제 농업 기술을 익힌다. 홉은 습도와 온도에 민감한 작물이기 때문에 저장 환경이 품질 유지의 핵심이다. 연 씨는 일정한 온도와 통풍이 가능한 공간을 활용해 홉의 향 성분이 손상되지 않도록 관리한다.

토종 홉 / EBS
토종 홉 / EBS

연 씨는 홉을 수확한 뒤 이를 이용해 맥주를 만드는 실습도 진행한다. 보리와 밀을 물에 담가 싹을 틔운 뒤 건조한 맥아를 분쇄하고, 70도 내외의 물에 1시간가량 끓이면 전분이 당분으로 전환돼 맥즙이 만들어진다. 여기에 홉을 넣고 끓이는 과정이 이어지며, 홉의 루플린이 열에 녹아 향과 쓴맛을 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생 홉과 건조 홉의 맛 차이를 비교하며 수제 맥주의 원리를 직접 체험한다. 맥즙을 걸러낸 뒤에는 효모를 넣고 1차 발효, 병입 후 2차 발효를 거치면 완성된 맥주가 된다.

홍천의 홉 재배가 다시 살아난 것은 단순히 연 씨의 성취에 그치지 않는다. 국내 맥주 산업에서 수입 원료 의존도가 99%를 넘는 상황에서, 토종 홉의 복원은 지역 농업의 자립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홉은 맥주의 향과 쓴맛을 조절하는 핵심 원료일 뿐 아니라, 항균 작용과 천연 방부 효과가 있어 기능성 식품 원료로도 활용될 수 있다.

홉은 대마과에 속하는 덩굴식물로, 유럽과 아시아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재배 작물이다. 수꽃과 암꽃이 따로 피며, 암꽃이 성숙해 솔방울 모양의 홉송이를 형성한다. 홉 속에는 루플린이라는 황색 분말이 들어 있는데, 여기에 함유된 알파산과 베타산이 맥주의 쓴맛과 향을 결정한다. 홉은 또한 맥주의 거품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며, 산화 방지 효과를 통해 저장성을 높인다. 수확 시기는 8월부터 9월이다. 건조 후에는 1년 내외로 사용할 수 있다.

홉의 품종은 향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비터 홉’은 쓴맛을 내기 위해 사용되고, ‘아로마 홉’은 향을 더하며, 두 가지 특성을 모두 지닌 ‘듀얼 퍼포스 홉’이 있다. 국내 토종 홉은 아로마 홉의 특성이 강하며, 은은한 풀향과 부드러운 쓴맛이 특징으로 평가받는다. 외국산 홉에 비해 향의 세기는 약하지만, 자연 발효 맥주나 수제 맥주에는 오히려 적합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연 씨는 홉 재배와 더불어 관련 가공품 개발도 추진하고 있다. 홉차, 홉 추출물, 홉 향 오일 등은 숙면·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되는 성분을 함유해 최근 수요가 증가하는 추세다. 그는 지역 내 다른 농가들과 협력해 홉 가공 협동조합 설립을 준비 중이다. 이를 통해 홍천 홉 브랜드를 구축하고, 농민들의 안정적인 수익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다.

연 씨의 목표는 단순한 작물 재배가 아니라 지역 자원을 활용한 순환형 농업 모델을 확립하는 데 있다. 홉 수확 후 남는 잎과 줄기는 퇴비로 사용해 토양을 살리고, 맥주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은 사료나 퇴비로 재활용된다. 이러한 순환 구조는 생산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평가된다. 연충흠 씨는 “홉은 단순한 작물이 아니라 지역의 자산”이라고 말한다.

토종 홉을 소개하는 EBS 다큐멘터리. / 'EBS 다큐' 유튜브
home 채석원 기자 jdtimes@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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