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위대한 소설 속 '첫 문장 톱10'
2025-12-20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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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 거장들의 첫 문장,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빛날까?
이동진이 선정한 세계 문학 명작 톱10, 첫 문장에 담긴 비결
소설의 첫 문장은 작가가 독자에게 건네는 첫 인사다. 또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갈고리이자,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신호탄이다.
지난 9월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유튜브 채널 'B TV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에서 세계 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첫 문장 톱10을 공개했다.
이동진 평론가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좋은 소설들이 있었고, 그중 어떤 소설들은 시간의 벽을 넘어 지금까지 고전으로 남아 있다"며, "역사상 최고의 첫 문장을 꼽는 야심찬 기획을 받았을 때 너무 하고 싶었지만, 양이 너무 방대해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어 "평생 책을 읽으려 노력했고 꽤 많은 책을 읽어온 저로서는 이 기회에 한번 정리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오늘 제가 즉각적으로 고르게 된 열 개의 주관적인 선택"이라고 강조했다.
첫 번째로 선정된 작품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혹시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라는 첫 문장은 20세기 최고의 문학 첫 문장으로 꼽힌다.

이 평론가는 "20세기 최고의 문학 스타가 누굴까 생각하면 알베르 카뮈가 아닌가 싶다"며 "이 두 문장은 정말 뒤에 술술 나올 것 같은 굉장한 문장이고, 이 관계를 통해 엄마랑 화자 사이가 별로 친숙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는 문장이다.
이 평론가는 "밤에 기차를 타고 어두운 터널을 막 지났는데 갑자기 온통 눈이 뒤덮인 풍경을 한번 생각해 보라"며 "밤에 어두우니까 까만데 눈이 와서 바닥이 하얗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고 표현하는 것은 굉장한 표현력이고, 시각적으로 막 그려진다"고 말했다.

세 번째는 조이스 캐럴 오츠의 '블론드'다. "죽음은 암갈색으로 사그라지는 빛 속에서 대로를 따라 돌진하며 등장했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평론가는 "이 블론드의 첫 문장을 꼽는 경우는 제가 본 적이 없다. 굉장히 주관성이 들어간 부분"이라며 "마릴린 먼로의 삶을 이야기할 때 처음부터 제대로 죽음을 앞세워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죽음을 의인화해 시작하는 이 문장은 두세 페이지에 걸쳐 프롤로그에서 집중적으로 죽음이 달려들어 그녀에게 죽음을 배송하는 풍경을 육박하면서 보여준다.
네 번째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흐릿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는 문장이다.
이 평론가는 "기억이라는 테마를 가장 잘 다룬 사람은 파트릭 모디아노가 아닌가 싶다"며 "이 문장들이 굉장히 서정적이면서 몽환적이고, 신비스러운 문체가 주는 소설을 읽는 기쁨을 제대로 주는 작가"라고 평가했다.
다섯 번째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흉칙한 벌레로 변해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문장이다.
이 평론가는 "이것도 첫 문장을 쓰면 뒤를 받기가 너무 어렵다. 초강력한 도입부 문장"이라며 "환상적인 부분으로 설정을 둠에도 불구하고 소설 자체의 문장은 굉장히 사실적이고 정확한 문장들을 구사해 나간다"고 설명했다.
여섯 번째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다. "우주는 부정수 혹은 무한수로 된 육각형 진열실들로 구성돼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평론가는 "보르헤스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작가"라며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보르헤스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AD와 BC를 나누듯이 보르헤스는 그런 결정적인 영향을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끼쳤다"고 말했다.
일곱 번째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각배를 타고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늙은이였다. 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한 날이 84일이나 계속됐다"는 문장이다.
이 평론가는 "헤밍웨이의 최고작은 노인과 바다가 아닌가 싶다"며 "감정에 관한 부분들, 가급적이면 부사나 형용사에 관한 부분들을 빼고 행동 위주로 묘사를 한다거나 쉬운 단어를 사용해서 굉장히 간결하면서도 드라이하고 효과적으로 이어나가는 문장의 행렬을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여덟 번째는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다. 첫 문장은 "특별한 순서 없이 기억이 떠오른다. 반들반들한 손목 안쪽. 뜨거운 프라이팬이 젖은 싱크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지면서 솟아오르는 증기"다.
소설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생각하는 남자의 이야기다. 이 평론가는 "과거를 떠올리면서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들을 쭉 묘사하는 굉장히 인상적인 도입부"라며 "실제로 겪었던 일 중에서 몰랐던 일들을 점점 알게 되는 구조를 갖고 있는데, 과거에 대한 회한 같은 정서를 다룬 소설"이라고 설명했다.
아홉 번째는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는 유명한 문장이다.
이 평론가는 "행복은 모든 불행들의 여집합"이라며 특정한 가정들이 불행할 때 그 불행한 이유를 보면 제각각 다르다. 한 가지 요소만 어긋나도 그것이 심각하게 결핍이 되면 그 가정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행복한 가정은 이런 각각의 요소들이 다 없이 있는 가정"이라고 해석했다.
마지막 열 번째는 페터 비크셀의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았던 남자'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은 남자가 말했다. 아무것도 더 알고 싶지 않은 남자는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기는 너무 일렀다. 그때 벌써 전화벨이 울렸다"는 문장이다.
이 평론가는 "앞의 아홉 편을 고를 때랑은 좀 가벼운 마음으로 골랐다"며 "페터 빅셀은 짧막한 소설을 쓰는데, 우화적이면서 착상이 굉장히 신선하고 동화적인 이야기들을 집중적으로 쓰는 작가"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고 선언한 남자가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역설적인 이야기"라 말했다.
다음은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유튜브 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