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마을] 한글문학기획전, 침묵의 언어로 기록한 여류 시인 ‘김안나’

2026-01-09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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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남는 역사
여성의 일상에서 피어난 고려인 문학

‘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 산하 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은 현재 진행 중인 ‘고려인 한글문학 기획전’을 통해, 소련 시기 고려인 시문학을 대표하는 여류 시인 김안나(출생연도 미상)의 시 세계가 조명하고 있다.

소련 시기 고려인 시문학을 대표하는 여류 시인 김안나(출생연도 미상) / 고려인마을
소련 시기 고려인 시문학을 대표하는 여류 시인 김안나(출생연도 미상) / 고려인마을

김안나는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서 살아간 공동체 안에서 활동한 시인이다. 그는 투쟁을 외치거나 역사를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부엌과 마당, 어머니의 손, 하루의 노동을 시에 담아냈다. 생활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길어 올린 언어는 오히려 가장 깊은 울림이 되었다.

* 소련 시기 고려인 시문학을 대표하는 여류 시인 김안나(출생연도 미상)/사진=고려인마을 제공

김안나의 시는 대규모 서사나 정치적 수사보다 생활의 언어와 감정의 결에 집중한다. 강제이주라는 거대한 비극을 사건이 아닌 ‘살아낸 하루들’의 축적으로 보여 주는 방식이다.

그의 작품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구절 중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만 하루의 끝에서/닳아버린 손을 조용히 씻었을 뿐이다.” 는 시어가 있다.

설명도 항의도 없는 이 짧은 시구에는, 침묵 속에서 역사를 감내해 온 여성들의 삶이 응축돼 있다. 김안나의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하지 않는 어머니’는 한 개인을 넘어, 강제이주 이후 공동체를 지탱해 온 모든 고려인 여성의 얼굴을 대변한다. 굳은살과 주름으로 남은 손의 흔적은 그 자체가 역사의 증언이다.

시의 무대 또한 특별하다. 전쟁과 국경이 아니라 부엌, 솥, 마당, 아이의 발걸음이 중심이 된다. 국가 폭력이 밀어낸 사람들이 살아남은 자리는 광장이 아니라 삶의 안쪽이었다. 김안나는 여성의 일상 공간을 문학의 중심으로 옮겨, 역사서에서 지워진 장소들을 시로 복원했다. 감정은 절제돼 있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상실과 강인함은 더욱 또렷해진다.

여기에 언어의 이중성이 더해진다. 한국어와 러시아어 사이에서 살아온 고려인 여성의 삶은 말해지지 못한 감정과 번역될 수 없는 기억을 품는다. 시에 배어 있는 낮은 호흡과 멈칫거림은, 떠남보다 머무를 수 없음이 남긴 상처를 조용히 드러낸다.

이러한 김안나의 시 세계는 김증손의 작품과 함께 읽힐 때 한층 선명해진다. 김증손이 노동과 계절, 반복되는 하루를 담담히 기록해 공동체의 생활사를 고정했다면, 김안나는 그 안쪽에서 여성의 침묵과 일상으로 내면의 역사를 완성했다. 여기에 이름 없이 작품을 남긴 수많은 여성 시인들의 목소리가 더해지며, 고려인 문학은 영웅과 투쟁의 기록이 아닌 ‘살아낸 역사’로 확장된다.

오늘날 김안나의 작품은 여성 디아스포라 문학, 고려인 생활사 기록, 침묵의 시간을 언어로 복원한 증언문학이라는 맥락에서 더욱 가치가 있다.

광주 고려인마을을 비롯한 여러 문화기관의 전시와 강좌, 낭독 프로그램에서도 김안나와 같은 여류시인의 존재는 공동체 기억의 숨은 주체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

따라서 김안나의 시는 기억하라고 외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하루를 견디며 살아낸 그 자체가 이미 역사라고 조용히 말한다. 따라서 그 침묵의 문장들은 지금, 고려인마을을 찾는 방문자의 마음에 고요히 내려앉고 있다.<이부형 (고려인마을) 기자>

home 이상호 기자 sanghodi@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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