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만실 33년, 1만 번의 울음소리 지켰다"~정년퇴임하는 '고위험 산모의 대부' 김윤하 교수
2026-02-28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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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정년퇴임… 전남대병원서 33년간 호남 지역 고위험 산모·신생아 지켜온 버팀목
"사라지는 아이 울음소리 안타까워… 필수의료 국가책임제 절실"
은퇴 후에도 로컬 병원서 진료 계속… "마지막 날까지 수술대 설 것"
[위키트리 광주전남취재본부 노해섭 기자] "처음 가운을 입었을 땐 분만실이 늘 북적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역의 산부인과들이 문을 닫고, 헬기를 타고 멀리서 오는 고위험 산모들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이 저립니다."
지난 33년간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호남 지역의 분만실을 지켜온 '고위험 산모들의 대부', 전남대학교병원 산부인과 김윤하 교수(고위험산모·신생아 통합치료센터장)가 오는 28일 정든 교정을 떠난다.
1993년 전남대병원에 첫발을 내디딘 청년 의사는 어느덧 머리가 희끗한 노교수가 되었지만, 생명을 향한 그의 열정은 여전하다. 김 교수는 정년퇴임을 하루 앞둔 27일에도 수술 일정을 소화하며 마지막까지 환자 곁을 지켰다.
◆1만 명의 생명 받아낸 '마지막 보루'
김 교수가 걸어온 33년은 대한민국, 특히 호남 지역 출산 지도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낸 시간이었다. 그는 전공의 기피 1순위로 꼽히는 산과(Obstetrics)를 묵묵히 지키며 약 1만 명에 달하는 새 생명을 세상으로 인도했다.
그는 "손바닥만 한 300g의 초미숙아가 건강하게 자라 성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의사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며 "아이의 첫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그간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지는 마법 같은 경험이 나를 30년 넘게 이 자리에 묶어두었다"고 회고했다.
◆"사명감만으론 버티기 힘든 현실… 국가가 책임져야"
하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다. 김 교수는 "전공의 시절 월 120건이던 우리 병원 분만 건수가 지금은 60건으로 반 토막 났고, 인근 병원은 월 10건도 채 되지 않는다"며 심각한 저출산과 필수의료 붕괴 현실을 토로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사명감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난해 뇌 손상 신생아 관련 거액의 배상 판결 사례를 언급하며, "고위험 분만을 담당하는 의료진이 법적·경제적 불안감 없이 진료에만 집중할 수 있는 '국가 책임제'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지역의 분만실 불은 영영 꺼질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 "은퇴는 없다, 로컬 병원서 제2의 인생"
그럼에도 김 교수는 후배들에게 "인류를 유지하는 임신과 출산을 책임진다는 자긍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AI 시대가 와도 생명을 창조하고 받는 고귀한 일은 기계가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김윤하 교수는 대학 병원 교수직은 내려놓지만, 의사로서의 삶은 멈추지 않는다. 퇴임 후에도 지역 로컬 병원에서 진료를 이어가며 지역 의료 발전에 힘을 보탤 계획이다.
김 교수는 "제 손을 거쳐 간 아이들이 안심하고 부모가 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미약하게나마 계속 힘을 보태고 싶다"며 "사명에는 은퇴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수술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