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선 너무 흔한데... 러시아 국민들 절반이 사랑한다는 '의외의 한국 라면'
2026-04-2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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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점유율 51% 차지한 사각형 라면의 정체
러시아의 기차 여행객들 사이에서 가장 익숙한 냄새는 노란색 사각 용기에서 풍겨 나오는 고소한 국물 향이다.

한국에서는 흔한 컵라면 중 하나인 팔도의 ‘도시락’이 러시아에서는 간단한 간식을 넘어 국민적인 주식으로 대접받고 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나 군부대 식당, 학생들의 자취방 어디에서든 도시락 용기를 흔히 볼 수 있다. 1억 4500만 명에 달하는 러시아 인구 중 10명 가운데 9명이 이 제품을 알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이런 압도적인 위치를 지키기 위해 팔도가 새로운 법인을 세우며 현지 사업 영토를 한층 더 넓히고 있다.
팔도의 러시아 법인인 도시락루스는 지난 2월 5억 3900만 루블(약 106억 원)을 투자해 신규 법인인 ‘도시락씨지’를 설립했다. 이는 2023년에 공장 법인인 도시락니즈니와 제분 회사인 도시락탐보프를 세운 지 약 3년 만에 이뤄진 추가 조치다. 이로써 팔도는 러시아에서 도시락루스, 도시락코야, 도시락리잔, 도시락니즈니, 도시락탐보프를 포함해 모두 6개의 법인을 운영하게 됐다. 원재료인 밀가루 생산부터 완제품 제조와 유통까지 현지에서 모두 해결하는 거대한 사업 체계를 완성해가는 모양새다.
러시아인의 마음을 훔친 사각형 용기와 마요네즈의 조합
도시락이 러시아에서 독보적인 자리에 오른 이유는 철저하게 현지인의 삶과 입맛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던 상인들에 의해 처음 소개됐을 때부터 도시락은 기존 라면들과 달랐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사각형 모양의 용기였다. 둥근 용기에 비해 사각형 용기는 흔들리는 기차 안의 좁은 선반에서도 쉽게 미끄러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짐을 쌀 때도 빈틈없이 쌓을 수 있어 보관이 편했다.

용기에 달린 플라스틱 뚜껑도 큰 역할을 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라면을 먹을 때 뚜껑을 앞접시 삼아 빵이나 소시지를 얹어 먹는 것을 즐긴다. 이 뚜껑은 뜨거운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아 면이 빨리 익도록 돕는 기능도 했다. 맛 또한 러시아 사람들의 취향을 저격했다. 한국의 매운맛 대신 소고기, 닭고기, 버섯, 새우 등 담백하고 고소한 맛 위주로 제품을 구성했다. 특히 러시아 사람들이 국물 요리에 마요네즈나 사워크림을 섞어 먹는 습관에 착안해 마요네즈 소스를 따로 넣은 제품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런 현지화 전략 덕분에 도시락은 러시아 인스턴트 라면 시장에서 점유율 50퍼센트를 넘기는 기염을 토했다. 한때 점유율이 60퍼센트 위로 치솟기도 했으나 경쟁 업체들의 추격으로 점유율이 조금씩 떨어지자 팔도는 대규모 투자로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현지 결제 업체 에보토르의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해 도시락의 시장 점유율은 51퍼센트로 조사됐다. 1년 전보다 2퍼센트포인트 줄어든 수치지만 여전히 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생산 설비 확충과 현지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
팔도의 러시아 법인들은 생산 시설을 계속해서 늘려가고 있다. 도시락리잔 법인은 새로운 설비를 들여오고 건설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1억 6000만 루블을 투입했다. 지난달에는 리잔 지역의 보리스 야신스키 주지사가 직접 공장을 찾아 경영진과 생산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주지사는 이 자리에서 지역 당국이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팔도의 사업에 힘을 실어주었다.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 경제를 살리는 기업으로서 대우받고 있는 셈이다.
도시락코야 역시 시설 투자를 멈추지 않고 있다. 현재 새로운 창고를 짓는 등 건설 중인 자산 규모가 6억 2220만 루블에 달한다. 도시락코야는 올해 안에 새로운 형태의 제품군을 선보여 사업 영역을 더 넓힐 계획이다. 한편 도시락니즈니는 운영 효율을 높이기 위해 지난해 마카로니 생산을 중단하고 관련 설비를 매각하거나 이전하는 등 체질 개선을 마쳤다. 라면 사업에 역량을 모으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수직 계열화도 팔도의 강점이다. 2023년에 탐보프 지역에 세운 제분소는 라면의 주원료인 밀가루를 직접 생산한다. 원재료 가격 변동에 크게 흔들리지 않고 안정적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제분소에서 만든 밀가루가 공장으로 가 면이 되고 유통사인 도시락루스를 통해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방식이다. 이런 탄탄한 기반은 경쟁사들이 쉽게 넘보지 못하는 장벽이 됐다.
한국 본사 매출 추월... 6000억 원 시대로 도약
가파른 성장세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팔도의 감사보고서를 보면 도시락루스와 도시락코야 두 법인의 지난해 합산 매출액은 6328억 원을 기록했다. 1년 전보다 29퍼센트 늘어난 수치다. 2021년만 해도 3000억 원 수준이던 매출이 불과 2년 만에 두 배가 넘는 6000억 원대로 올라섰다. 특히 유통을 담당하는 도시락루스의 지난해 매출은 5009억 원으로 한국 본사인 팔도의 매출액 4737억 원을 웃돌았다. 러시아 법인이 본사보다 더 큰 수익을 내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현지 법인의 순자산 규모도 빠르게 커졌다. 도시락루스의 순자산은 2024년 3798억 원에서 지난해 6027억 원으로 59퍼센트나 증가했다. 도시락코야도 같은 기간 순자산이 42퍼센트 확대됐다. 러시아 사업이 팔도 그룹 전체의 성장을 이끄는 동력이 된 셈이다. 다만 벌어들인 돈을 한국 본사로 가져오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2022년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 여파로 인해 러시아의 외환 통제가 매우 엄격해졌기 때문이다.
팔도는 지난 2년 동안 본사로 배당금을 보내지 못했다. 사업 초기에는 이익을 현지 투자에 썼고 수년 전부터는 배당을 시작해 2023년에는 300억 원 가까운 돈을 본사에 보냈다. 하지만 외환 통제 강화로 배당이 막히자 팔도는 이 돈을 다시 러시아 사업을 키우는 데 쓰기로 했다. 신설 법인을 세우고 제조 기반인 공장에 100억 원 이상의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밖으로 돈을 빼기보다 안에서 몸집을 더 키우는 전략을 선택했다.
K-라면의 성지로 부상한 러시아... 치열해지는 순위 다툼
러시아는 이제 한국 라면 업체들이 사활을 거는 격전지가 됐다. 시장조사 기관 유로모니터는 러시아 라면 시장이 2030년까지 해마다 10퍼센트대 성장을 거듭해 10억 5000만 달러 규모까지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한류 열풍으로 한국 음식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것도 큰 몫을 했다. 지난해 한국의 대러시아 라면 수출액은 4586만 달러로 1년 전보다 75퍼센트나 급증했다.
경쟁자들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삼양식품의 불닭볶음면은 젊은 층 사이에서 매운맛 챌린지 유행을 타고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신라면을 앞세운 농심도 오는 6월 러시아 법인 설립을 앞두고 있어 시장 경쟁은 더 뜨거워질 전망이다. 팔도는 이미 구축한 현지 생산망과 유통망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의 정서에 깊이 박힌 ‘도시락’이라는 브랜드 위상으로 수성에 나선다.
팔도 관계자는 앞으로도 러시아 시장에서 자리를 더 견고하게 다지기 위해 투자를 계속 늘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봇짐상인의 손에서 시작해 러시아의 국민 브랜드가 된 도시락의 행보는 멈추지 않고 있다. 현지인들의 식습관을 존중하고 그들의 삶 속에 녹아든 팔도의 전략이 새로운 투자와 만나 어떤 결과를 낼지 업계가 살피고 있다. 러시아 밥상 위의 노란 사각형 용기는 오늘도 고소한 김을 내뿜으며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