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가 불법인데 전 국민이 아직도 속고 있다는 골목길 '녹색통'의 정체
2026-04-29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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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함인 줄 알았던 의류수거함의 진실
동네 골목 어귀에 서 있는 초록색 의류수거함이 사실은 수십 년째 개인 사업자의 수익 창구로 운영돼 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조명받고 있다.

의류수거함의 시작은 1998년 IMF 외환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헌 옷을 모아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취지에서 전국 각지에 수거함이 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기부가 아닌 영리를 목적으로 수거함을 무분별하게 설치하는 개인 사업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지난 13일 이민옥 서울시의회 의원에 따르면 전국 약 10만 5000여 개 의류수거함 중 70% 이상이 개인 사업자에 의해 관리 기준 없이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착한 마음으로 옷을 넣었던 시민들은 사실상 개인 사업자의 수익을 오랫동안 뒷받침해 온 셈이다.
제주시 상황도 비슷하다. 지난 21일 이 같은 불법 의류수거함 실태를 공식 발표하며 강력 대응에 나섰다. 제주시에 따르면 연동 59곳 113개, 노형동 53곳 114개, 이도2동 73곳 104개 등 총 185곳에 걸쳐 331개의 무단 설치 수거함이 확인됐다. 이는 제주시 전체 수거함의 40%에 달하는 수치다.

제주시는 공개 입찰로 12곳의 민간대행 사업자를 지정해 의류수거함을 운영하도록 하고 있으나, 입찰에서 탈락한 업체 2곳이 수거함을 철수하지 않으면서 불법 수거함이 양산된 것으로 드러났다.
제주시는 무단 설치 수거함에 원상회복 명령을 내렸으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행정대집행을 통해 강제 철거에 나서기로 했다. 반복·상습적으로 위반 행위가 적발될 경우에는 과태료 부과와 함께 업무방해 혐의로 경찰에 고발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홍권성 제주시 생활환경과장은 "무단 설치는 명백한 불법행위로 어떠한 예외도 없이 끝까지 책임을 묻고 반드시 근절하겠다"며 "시민들은 경고 스티커가 붙은 의류수거함은 이용하지 말고 올바른 배출 문화 정착에 협조해 달라"고 당부했다.
시민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의류수거함에 넣은 옷이 불우이웃에게 돌아가는 경우는 드물다. 수거된 헌 옷은 사업자가 운영하는 집하장으로 모인 뒤 상태에 따라 국내 구제 의류 시장에 팔리거나 아프리카·인도·필리핀 등 개발도상국으로 수출된다. 명품 브랜드나 고가 제품은 선별 단계에서 따로 챙겨 판매하는 구조도 오래전부터 관행처럼 굳어져 왔다.
이 구조에 최근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빈티지 명품, 올드머니룩, 프리미엄 구제 같은 트렌드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의류수거함에서 건져 낸 헌 옷의 수익성이 크게 높아진 것이다.
과거에는 수거된 옷을 킬로그램 단위로 동남아나 아프리카에 헐값에 팔았지만, 지금은 버려진 명품 브랜드 의류가 보세 매장에서 고가에 재판매되는 상황이다. 서울 동묘 일대의 구제 상인들은 부유한 동네의 의류수거함일수록 좋은 물건이 많이 나온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불법 수거함이 근절되지 않는 배경에는 이 같은 수익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의류수거함이 환경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2026년 1월 기후부와 환경산업기술원 등에 따르면 한 해 동안 국내에서 버려지는 폐의류는 약 30만~35만 톤 수준이며 1인당으로 환산하면 연간 6~7㎏에 달한다.
패스트패션의 확산과 온라인 쇼핑 증가로 옷의 수명은 갈수록 짧아졌고 버려지는 속도는 빨라졌다. 불법 수거함을 통해 모인 옷들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방치되거나 소각될 경우 폐의류 문제는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다.

수거함 주변의 위생 문제도 오래된 골칫거리다. 의류수거함 옆에는 과자봉지나 빈 페트병, 포장재 쓰레기가 쌓이는 일이 다반사고, 침구류나 대형 폐기물을 몰래 버리는 사례도 끊이지 않는다.
한국일보가 2020년 8월 서울 시내 수거함 30여 개를 열어 확인한 결과 거의 모든 수거함에서 과자봉지나 빈 생수병 등 생활 쓰레기가 함께 나왔고, 썩은 고기와 젖은 수영복까지 나온 경우도 있었다. 의류수거함이 재활용 시설이 아니라 불법 쓰레기 투기 장소로 전락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지자체별로 관리 수준은 크게 다르다. 서울 서초구는 2016년 관내에 설치된 430여 개의 무허가 불법 수거함 실태를 전수조사한 뒤 이듬해 대부분을 철거했다. 송파구는 781개의 수거함을 2개 업체와 협약해 관리하며 매년 전수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제주시는 재활용도움센터와 클린하우스 운영에 예산이 집중되면서 표준화된 수거함을 자체 제작할 예산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다. 반면 같은 제주도 내 서귀포시는 지난해 행정이 직접 표준화된 수거함 340개를 제작·설치한 뒤 임대료를 받고 민간 사업자에게 운영을 맡기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처럼 지자체마다 대응이 제각각인 탓에 수거함의 운영 주체와 수익금 사용처가 시민에게 공개되지 않는 경우가 여전히 많고, 착한 의도로 시작된 의류수거함은 수십 년째 불투명한 구조 속에 방치돼 왔다.
시민들이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은 경고 스티커가 붙은 수거함에는 옷을 넣지 않는 것이다. 헌 옷을 실제로 필요한 곳에 보내고 싶다면 지자체 공식 운영 수거함을 이용하거나 직접 비영리단체와 복지시설에 기부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