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곡] 우리는 '이소라'라는 뮤지션을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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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라 7집의 ‘Track 7’을 듣다
고통을 과장하지 않아서 더 아픈 노래

한국 대중음악에서 이소라라는 이름은 독특한 방식으로 소비돼왔다. 상당수 대중은 그를 오래도록 '감성의 가수'로 떠받들고 있다. 그러나 이 표현은 편리한 만큼 이소라에 대한 많은 평가를 지워버린다. 감성이라는 말은 이소라의 음악을 설명하기에 지나치게 부드럽다. 그는 한국 대중음악 안에서 감정을 가장 비정하게 다뤄온 인물이다. 대부분의 발라드가 감정을 증폭하고 정리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면, 이소라는 반대로 감정이 해체되는 과정 자체를 음악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돌이켜보면 이소라의 음악에는 늘 어떤 불편함이 있었다. 그 불편함은 음정이나 완성도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실제적이라는 데서 발생한다. 많은 가수는 슬픔을 노래할 때 슬픔을 '표현'한다. 그들의 노래에서 감정은 공유 가능한 형태로 가공된다. 그러나 이소라는 감정을 완성된 상태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의 노래 속 감정은 종종 덜 정리된 채 남아 있다. 무너지는 중이고, 증발하는 중이며, 아직 언어가 되지 못한 상태에 머문다. 그래서 이소라의 음악은 종종 설명보다 잔향으로 기억된다.
생각해보면 이소라는 데뷔 초기부터 한국 발라드의 중심 문법과 조금 어긋나 있었다. 그는 분명 대중적인 멜로디를 부를 수 있는 가수다.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이소라를 두고 '완성형 보컬', '천재 보컬리스트'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건 초기 대표곡들만 들어봐도 알 수 있다. '난 행복해', '청혼', '처음 느낌 그대로' 같은 노래들은 멜로디도 선명하고 감정의 방향도 비교적 명확하다.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고, 감정의 출구도 분명하다. 그런데 그 시기에도 이미 뭔가 달랐다. 다른 가수들이 감정을 크게 펼쳐 보일 때, 이소라는 자꾸 안으로 접었다. 울음을 터뜨리기보다 삼키는 방식에 가까웠다. 당시에는 그 차이가 미묘하게 느껴졌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간극이 점점 더 벌어진다.
4집 이후의 이소라는 점점 더 '노래'보다 '상태'에 가까운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제발'을 떠올려보면 흥미롭다. 많은 사람이 그 곡을 폭발적인 감정의 노래로 기억하지만, 실제로 귀를 기울여보면 이소라는 끝까지 감정을 완전히 폭발시키지 않는다. 그 곡에는 절규보다 억눌림이 더 많다. 감정은 바깥으로 터져 나오지 못하고 계속 몸 안쪽에 남아 있다. 듣고 있으면 누군가가 우는 장면이라기보다 울음을 참다가 호흡 자체가 흔들리는 장면에 가깝다.
특히 이 시기의 이소라는 박자를 정교하게 밀어붙이는 보컬보다 박자 주변을 미세하게 흔드는 보컬에 가까워진다. 어떤 음절은 예상보다 조금 늦게 들어오고, 문장 끝은 흐려진 채 사라진다. 안정적으로 감정을 전달하기보다 호흡이 흔들리는 상태 자체를 노래 안에 남겨두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정확하게 부른다는 느낌보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이소라의 보컬이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음색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사실 이소라 보컬의 핵심은 호흡에 있다. 그는 노래를 안정적으로 지탱하려 하지 않는다. 문장 끝은 자꾸 가라앉고, 음절은 흐려지며, 숨은 계속 새어나간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불완전한 발성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때문에 그의 노래는 이상할 정도의 실제성을 획득한다. 완벽하게 통제된 발성은 감정을 전달하지만, 통제를 잃어가는 발성은 감정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만든다. 이소라의 보컬이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발라드는 감정을 '설계'한다. 청자가 어느 지점에서 울고, 어느 순간 고양돼야 하는지 계산한다. 하지만 이소라의 음악은 그런 방향성을 점점 거부하기 시작한다. 그는 감정을 정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리되지 못한 상태를 그대로 남겨둔다. 그 흐름이 극단까지 밀려간 결과가 7집이다.
이 음반은 처음부터 '설명'을 포기하고 들어간다. 앨범의 제목도 없고 수록곡도 제목이 없다. 감정이 언어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태도. 어떤 상태들은 이름 붙는 순간 지나치게 매끈해진다. '슬픔', '외로움', '상실' 같은 단어는 편리하지만 동시에 실제 감각을 지나치게 빠르게 봉합한다. 이소라는 그 봉합을 거부한다.
그래서 7집의 곡들은 메시지처럼 들리지 않는다. 의미를 전달하기보다 특정한 기압을 유지한다. 청자는 곡을 이해하기보다 먼저 노출된다. 그 안에 오래 머물게 된다. 그리고 이한철이 작곡한 앨범의 일곱 번째 곡 '트랙 7'은 그 음반 전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곡이다.
노래를 듣고 가장 먼저 받게 되는 인상은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중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다. 도입이 있고, 상승이 있고, 감정의 정점이 있으며, 해소가 있다. 그러나 '트랙 7'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곡은 특정 지점을 계속 맴돈다. 리듬은 흐릿하고, 멜로디는 방향성을 잃은 듯 떠다닌다. 감정은 커지지 않고 계속 침전된다.
특히 이 곡은 일반적인 발라드처럼 뚜렷한 기승전결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 리듬 파트 역시 감정을 앞으로 끌고 가기보다 낮게 깔린 상태를 오래 유지한다. 악기들은 서로를 선명하게 드러내기보다 흐릿하게 겹쳐지고, 보컬 역시 사운드의 맨 앞에서 감정을 밀어 올리기보다 전체 공간 안으로 스며든다. 그래서 청자는 음악이 어디론가 전진한다는 느낌보다 같은 공기 안에 오래 머물고 있다는 감각을 받게 된다.
이상한 건 그 정체감이 지루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곡이 진행될수록 청자는 점점 더 내부로 끌려 들어간다. 그 이유는 이 노래가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감정이 신체 안에서 작동하는 방식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우울은 종종 이런 방식으로 지속된다. 선명한 사건처럼 오기보다 시간 감각을 흐리게 만들며 사람을 잠식한다. 하루와 하루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감정은 폭발하지 않은 채 낮은 압력으로 오래 이어진다. 사람은 무너지고 있는데 동시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하루를 보낸다. '트랙 7'은 바로 그 지속 상태를 포착한다.
그래서 이 곡에서 중요한 것은 멜로디보다 질감이다. 악기들은 적극적으로 감정을 밀어붙이지 않는다. 사운드는 넓게 비어 있고, 침묵은 지나치게 오래 남는다. 보통의 발라드라면 채워졌을 공간들이 여기서는 그대로 비워져 있다. 그런데 바로 그 공백 때문에 청자는 자기 내부의 감각을 듣기 시작한다.

실제로 이 곡의 사운드는 여백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악기 수가 많지 않은 편인데도 각각의 소리는 넓은 공간 안에 떨어져 배치돼 있다. 보컬 주변에 남는 잔향 역시 감정을 극적으로 증폭시키기보다 목소리를 공간 안에 오래 머물게 만든다. 그래서 이소라의 목소리는 청자 바로 앞에서 호소하기보다 이미 한참 뒤의 기억처럼 들린다. 가까이 있으면서 동시에 멀리 있는 목소리. '트랙 7'의 불안감은 바로 이런 거리감에서 나온다. 이소라는 그 공간 안에서 거의 붕괴 직전의 호흡으로 노래한다.
"지난 밤 날 재워준 약 어딨는 거야. 한 움큼 날 재워준 약 어디 둔 거야. 나 몰래 숨기지 마. 말했잖아, 완벽한 너나 참아. 오 다 외로워 그래요. 너 없는 나, 눈을 뜨면 다시 잠을 자 난 난. 몸이라도 편하게 좀 잔다는 거야. 나 몰래 숨기지 마. 난 있잖아, 술보단 이게 나아. 오 다 외로워 그래요. 너 없는 나, 눈을 뜨면 다시 잠을 자 난 난."
흥미로운 건 이런 문장이 조금도 극적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소라는 이 가사를 비극적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절규하지 않고, 감정을 밀어 올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담담하다. 마치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새벽에 혼잣말처럼 툭 흘리는 목소리에 가깝다. 그리고 바로 그 무심함 때문에 이 노래는 훨씬 더 불편해진다.
대부분의 대중음악은 고통을 서사화한다. 상처는 기승전결 속에 배치되고, 비극은 아름다운 형태로 정돈된다. 그러나 실제 삶의 고통은 종종 그렇지 않다. 인간은 가장 깊이 무너질 때 오히려 감정을 잃는다. 너무 오래 지치면 슬픔조차 납작해진다. 절망은 거대한 사건이라기보다 아주 일상적인 피로의 형태를 띤다. '트랙 7'은 그 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노래다. 그래서 이 곡은 흔한 의미의 '슬픈 노래'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의 마비 상태에 가깝다. 어떤 날들은 단지 계속 깨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견디기 어렵다. 이 노래는 바로 그 수준까지 내려간다. 이 지점에서 이소라는 단순한 보컬리스트의 범주를 벗어난다.
이소라는 직접 곡을 많이 쓰는 뮤지션은 아니다. 그를 단순히 '곡을 잘 받는 가수'로 설명하기도 어렵다. 실제로 그의 음반들은 참여 작곡가가 달라도 비교적 일관된 정서를 유지한다. 같은 멜로디라도 이소라의 보컬을 통과하면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다른 가수라면 극적으로 처리했을 부분들이 그의 목소리 안에서는 힘없이 가라앉는다. 바로 이 가라앉음 때문에 더 긴 잔향을 남긴다. 단순한 선곡 감각이나 해석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이소라는 음악의 중심에 있는 감정의 밀도를 조정하는 사람이다. 어떤 곡이든 그의 손을 거치면 감정의 온도가 달라진다. 더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오래 식지 않는 쪽으로. 이소라가 한영애와 함께 남의 노래를 자기화할 수 있는 드문 보컬이라는 상찬을 받는 데는 이런 사정이 있다.
이소라의 음악은 자주 '새벽 같다'는 말을 듣는다. 단순한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다. 새벽이라는 시간대가 가진 감각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새벽에는 감정이 과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것이 조금 탈색된다. 생각은 지나치게 선명해지고, 몸은 지쳐 있으며,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이소라의 음악은 바로 그 상태를 오래 지속시킨다. 특히 '트랙 7'이 그렇다.
그래서 이 곡은 나이가 들수록 더 깊이 박힌다. 젊을 때는 그저 우울한 음악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을 오래 통과한 뒤 다시 들으면 전혀 다른 층위로 다가온다. 인간이 어떻게 조금씩 마모되는지, 어떻게 아무 일 없는 얼굴로 오래 버티는지, 어떻게 피로가 결국 신체의 호흡과 말투까지 바꾸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트랙 7'은 바로 그 마모의 감각을 기록한 드문 노래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이소라라는 음악가가 한국 대중음악 안에서 차지하는 진짜 위치인지도 모른다. 그는 감정을 크게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이 더 이상 외쳐지지 못하는 상태를 자기만의 언어로 들려주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