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고려인마을, 연해주 독립유공자를 찾아서 ‘김아파나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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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독립을 외치다 총살당한 청년 혁명가
일본 밀정 누명 쓰고 생 마감… 19년 뒤 명예회복
정부,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국권을 잃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지만, 스탈린 시대의 광풍 속에서 일본 밀정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생을 마감해야 했던 한 고려인 독립운동가가 있다. 바로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선구자 김 아파나시(1900~1938) 선생이다.

‘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발행되는 고려신문과 공동으로 추진 중인 「연해주 고려인 독립유공자 후손 발굴·지원 사업」을 통해 스물두 번째 인물로 김 아파나시 선생의 삶과 항일독립정신을 재조명한다고 밝혔다.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선구자 김 아파나시(1900~1938) 선생 / 고려인마을
연해주 항일독립운동의 선구자 김 아파나시(1900~1938) 선생 / 고려인마을

김 아파나시 선생은 1900년 연해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민족의 현실을 가슴 깊이 품고 성장했다. 그는 1917년 러시아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청년단체를 조직해 민족해방운동에 나섰으며, 이듬해 열린 한인청년학생 전시베리아대회에서는 중앙위원회 비서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다.

특히 1919년 국내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연해주 한인 청년들을 대표해 블라디보스토크 지역 청년지도자들과 연대하며 해외 독립만세운동 확산에 앞장섰다. 그는 러시아어 항일 신문 「학생의 목소리」를 발간해 일제의 침략상을 국제사회에 알렸고, 블라디보스토크 만세시위에 직접 참여해 조국 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외쳤다.

또한 오성묵 선생과 함께 일제가 국내 3·1 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사실을 규탄하는 항의문을 일본 영사관에 전달하며 국제적 여론 형성에도 힘을 쏟았다. 이는 단순한 시위를 넘어 조국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고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호소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이후 김 아파나시 선생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한국 독립문제와 러시아 거주 한인들의 자치권 확보를 위해 헌신했다. 그러나 역사의 비극은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1935년 스탈린 정권의 대숙청이 시작되자 선생은 "반혁명 세력의 지령을 받아 일본 첩보기관을 위한 간첩 활동을 했다"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됐다. 평생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가 오히려 일본 밀정으로 몰린 것이다.

결국 선생은 1938년 5월 25일 총살당했다. 향년 38세. 조국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청년 혁명가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진실은 끝내 묻히지 않았다. 스탈린 사후인 1957년 11월 19일 소련 정부는 선생에 대한 판결이 부당했음을 인정하고 공식 복권했다. 총살당한 지 19년 만에 되찾은 명예였다.

대한민국 정부도 그의 숭고한 공훈을 기려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했다. 비록 생전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희생과 헌신은 오늘날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소중한 한 페이지로 기록되고 있다.

고려인마을 관계자는 “김 아파나시 선생의 삶은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함께 국권상실 시대가 만들어낸 비극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언”이라며 “선조들이 피와 눈물로 지켜낸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후손들에게 올바르게 전하기 위해 독립유공자 발굴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광주 고려인마을은 고려신문과 공동으로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을 발굴·지원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잊혀진 고려인 독립운동가들의 삶과 업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