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지섭 드라마가 소환한 '북파공작원'의 실체... 실제로 '붙잡히면 자결'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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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명령으로 사지로 향했지만 존재 자체가 기밀이었던 그들

배우 소지섭이 주연한 드라마 '김부장'이 인기를 끌면서 북파공작원의 실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나라의 명령을 받고 사지로 향했지만 존재 자체가 기밀에 부쳐졌던 이들의 비극적인 삶도 다시 조명받고 있다.


SBS 드라마 '김부장'
SBS 드라마 '김부장'

북파공작원은 남북이 총부리를 겨누던 시절 군과 정보기관의 지휘 아래 적 후방으로 침투해 요인 생포와 사살, 첩보 수집 같은 비밀 임무를 수행한 이들을 가리킨다. 1948년 무렵부터 은밀히 북으로 보내졌다. 6·25전쟁을 거쳐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1972년까지 1만3000여명이 투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생사조차 확인되지 못한 채 실종 처리된 인원만 7726명에 이른다.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이 서로 공작원 파견을 자제하기로 하면서 대규모 침투는 사실상 멈췄지만 북으로 보내진 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정확한 규모와 최후는 지금도 상당 부분 확인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북파공작원 역사는 정부 수립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0년대 후반 활동한 부대를 시작으로 6·25전쟁 시기 적 후방에서 첩보 임무를 맡은 부대들이 움직였고, 휴전 이후에도 남과 북은 서로를 향해 수많은 공작원을 들여보냈다.

SBS 드라마 '김부장'
SBS 드라마 '김부장'

북파공작원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실미도 사건이다. 북한 124군부대 소속 김신조 등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노린 1·21 사태가 1968년 1월 벌어지자, 정부는 이에 맞서 김일성 암살을 목표로 한 보복 부대를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그해 4월 공군이 세운 것이 실미도 부대, 이른바 684부대다. 인천 앞바다 실미도에 격리된 대원 31명은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북파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남북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이들의 임무는 기약 없이 미뤄졌다. 갈 곳도 돌아갈 곳도 없이 섬에 방치된 대원들은 1971년 8월 23일 무장한 채 섬을 빠져나왔다. 교관과 기간병을 제압하고 인천에 상륙한 뒤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지만, 시내에서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다 대부분 수류탄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살아남은 4명은 재판을 거쳐 사형에 처해졌고, 이 과정에서 경찰 2명과 민간인 6명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부대의 존재와 대원들의 최후는 오랫동안 '무장공비의 소행'으로 둔갑한 채 은폐됐다가 뒷날 영화로도 만들어지며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육군과 해군, 공군은 각각 별도의 첩보부대를 두고 공작원을 운용했다. 선발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다. 초기에는 마땅히 기댈 곳이 없던 처지의 청년들이 주로 뽑혔지만 갈수록 학력과 신원 요건이 점점 까다로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북파공작원 상당수는 군번도 계급도 없는 민간인 신분이었다. 부대는 민간 기업 간판을 내걸었고 공작원들도 회사원으로 위장했다. 발각되더라도 국가의 개입을 부인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희생자의 절대다수가 이런 민간인 부대에서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SBS 드라마 '김부장'
SBS 드라마 '김부장'

현장에서 이들이 맡은 임무는 다양했다. 고정간첩에게 공작금과 장비를 전달하고 기밀문서를 받아오는 일, 위성이나 항공사진으로는 파악하기 어려운 군사시설에 직접 접근해 첩보를 수집하는 일, 국경 부근의 적 시설을 폭파하는 일까지 종류가 나뉘었다. 발각되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이 희박했던 탓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스며들었다가 빠져나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무장은 최소한으로 줄였고, 붙잡히기 직전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독약 캡슐이 지급되기도 했다.

이들의 삶은 어떤 공식 기록에도 온전히 남지 못했다. 1984년부터 3년간 북파공작원으로 훈련받은 하태준 특수임무수행자유족동지회 회장(67)은 18일자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헌법의 보호 밖에 놓였던 공작원들의 처지를 증언했다.

하 회장에 따르면 정부는 당장 다음 끼니를 걱정하던 형편의 청년들을 주된 표적으로 삼았다고 한다. 평생 먹고살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앞세웠지만 정작 어떤 일을 맡게 되는지는 끝까지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 회장은 연합뉴스에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것"이라고 말했다.

체력 검사를 받는다며 데려간 곳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훈련소였다고 한다. 가족에게는 아무런 통보도 가지 않았다. 하 회장은 집안 막내가 말 한마디 없이 사라지자 가족이 그를 찾아 헤매며 집안이 쑥대밭이 됐다고 돌아봤다. 이후 이어진 훈련은 사람을 하나의 병기로 만드는 과정이었다. 구타와 고문을 버텨내는 훈련이 일상이었고, 북에서 붙잡혀도 고문을 견디게 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훈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목숨을 잃거나 평생 장애를 안게 된 대원도 있었다고 한다.

훈련 과정은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는 것이 생존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적진에 스며들었다가 빠져나오는 은신술, 하루에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는 산악 구보, 얼음물과 굶주림을 견디는 생존 훈련이 이어졌다. 붙잡혔을 때를 대비한 훈련과 최악의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까지 몸에 익혀야 했다.

감시는 촘촘했다. 하 회장은 공작원 한 명에게 교관과 감시 요원 등 네 명이 따라붙었다고 전했다. 가족의 부고가 전해져도 감시 요원들은 이를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도, 반대로 공작원이 임무 도중 숨져도 어느 쪽에도 소식이 닿지 않는 완전한 격리 상태였다는 설명이다.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온 뒤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폐해진 채 돌아온 이들은 가족에게조차 낯선 사람이 돼 있었다. 극한의 훈련과 임무를 거치며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다 오랜 세월 병을 안고 살아온 이들도 적지 않다. 3년 만에 돌아온 자신을 본 가족이 눈빛에 살기가 서렸다고 하더라는 것이 하 회장의 회고다. 오랜 세월 보지 못한 아들이 돌아온다는 소식에 달려나오던 어머니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숨졌다는 한 공작원의 사연은 지금도 이들 사이에서 전해지고 있다. 하 회장은 목숨을 걸고 일했지만 국가가 끝내 자신들을 버렸다고 했다.

음지에 묻혀 있던 이들의 존재가 처음 드러난 것은 2002년 법원이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면서다. 이어 2004년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마련되며 국가 차원의 논의가 시작됐다. 이 과정에는 명예 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생존자들의 절박한 행동이 있었다. 그러나 생존자와 유족들은 명예 회복과 보상이 여전히 미흡하다고 입을 모은다.

현재 특수임무유공자는 참전유공자나 다른 국가유공자에게 지급되는 정기 수당 대상에서 빠져 있다. 의료 지원이나 보훈병원 진료비 감면 등 현물 위주의 혜택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8월 김동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특수임무유공자에게 정기적인 명예 수당을 지급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지만, 이 법안은 아직 국회에 계류돼 있다.

특별법 제정으로 일부 보상이 이뤄졌지만, 그 사이 상당수 공작원과 유족은 합당한 예우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남은 생존자들도 대부분 고령에 접어들어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을 이들은 거듭 호소하고 있다.

고령에 접어든 생존자들을 괴롭히는 또 다른 문제는 오래 묵은 사회적 편견이다. 북파공작원이 범죄자나 사형수 출신이라는 시선이 대표적이다. 하 회장은 실제 범죄 전력이 있던 인원은 33명가량으로 전체 1만여명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평범한 민간인 청년이었다고 강조했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공작원이 된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 하 회장 설명이다.

하 회장은 연합뉴스에 목숨을 걸고 국가를 위해 일한 사람들이 독립유공자에 준하는 예우를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국가가 이들의 공로와 희생, 피해에 걸맞은 보상을 하고 그에 걸맞은 예우와 지원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하 회장의 요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