겹겹이 쌓인 32구 시신이 천장에…39년전 ‘오늘’ 발생한 초유의 ‘집단 변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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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여성 사업가의 정체, 89억 사채와 집단 변사의 미스테리
지금으로부터 39년 전인 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군(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북리의 오대양 공예품 공장에서 32명이 한꺼번에 숨진 채 발견됐다. 공장 내 식당 천장 위 공간에서 대표와 그 가족, 종업원들이 겹겹이 쌓인 모습으로 발견된 이 사건은 발생 직후부터 지금까지도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되고 있다. 사망자 대부분은 오대양이라는 회사가 사실상 운영하던 사이비 종교의 신도였다. 이들은 왜 목숨을 끊는 길을 택했을까.

성공한 사업가로 위장한 교주
사건의 중심에는 당시 48세였던 박순자가 있었다. 박순자는 과거 신학교에 다니다 여호와의 증인에 입교했고, 이후 기독교복음침례회 계열인 구원파에 출석하며 권신찬, 유병언과 연을 맺었다. 이후 구원파를 이탈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을 데리고 나와 1984년 5월 대전에서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운 오대양을 만들었다. 명목상으로는 민속공예품을 제조, 판매하는 회사였다.
오대양은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88서울올림픽 공식 협력 업체로 지정되는 등 외형적으로 급성장했다. 이를 발판 삼아 대전과 용인 등지에 공장을 사들이며 사업을 확장했고, 유치원과 양로원, 보육원 건물까지 사들이거나 임대해 사회사업까지 벌였다. 이런 행보 덕분에 박순자는 한동안 성공한 여성 사업가로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은 실제로는 부모 없는 원생이 아니라 직원들의 자녀였고, 양로원의 노인들도 직원들의 부모였다. 공예품 공장은 실제 생산 기능이 거의 없었으며, 판매하던 제품 상당수는 다른 업체에서 사들인 모조품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업 실패가 부른 사채 눈덩이
결정적 파국은 1986년 4월 찾아왔다. 박순자는 일본의 한 전자부품 생산업체와 합작해 7억원을 투자, 전자제품 생산에 나섰지만 사기를 당해 사업이 그대로 무너졌다. 이 손실을 메우기 위해 박순자는 신도들에게 사채를 최대한 끌어오라고 지시했고, 이렇게 모인 사채 규모는 약 89억원에 달했다. 문제는 이 돈을 갚지 않고 계속 끌어쓰기만 하면서 이자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점이다.
채권자 집단폭행이 부른 파국
1987년 8월 16일 박순자에게 5억원을 빌려준 채권자 이상배가 돈을 받으러 오대양 공장을 찾았다가 신도들에게 집단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상배는 곧바로 경찰에 오대양을 고소했고,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다른 채권자들도 잇따라 고소에 나서면서 오대양은 순식간에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됐다. 감당할 수 없는 사채 이자에 경찰과 언론의 압박까지 겹치자, 박순자는 전 신도와 자기 가족을 포함한 80명을 용인 공장으로 불러 모았다. 그중 자신과 자녀들, 사채를 가장 많이 끌어온 신도 등 32명만을 따로 골라 식당 천장으로 데리고 올라간 것으로 조사됐다.

발견 당시 현장은 어땠나
이들이 발견된 것은 8월 29일 오후였다. 직원 김모씨가 공장에 내려왔다가 내려앉은 숙소 천장을 이상하게 여겨 식당 쪽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숨져 있는 32명을 발견했다. 김씨는 마침 가족을 찾으러 공장에 온 박순자의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남편이 오후 4시 무렵 경찰에 신고하면서 사건이 세상에 드러났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천장 위 좁은 공간에는 속옷 또는 잠옷 차림의 시신들이 이불을 쌓아놓은 듯 19명, 12명씩 나뉘어 쌓여 있었고, 공장장 이경수는 속옷 차림으로 서까래에 목을 맨 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당시 천장 위 온도는 섭씨 71도에 달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고온 환경에서 탈수 증상까지 겹치며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 빠진 것이 사망 경위와 관련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메모가 남긴 단서들
현장에서는 사망자들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메모도 다수 발견됐다. "사장이 독약과 물을 가지러 갔다", "XX도 지금 매우 고통받고 있다", "남자는 다 잡혀가고 여자들은 다 헤어지고", "이미 의식이 없으시다", "네시간 전부터 다섯명 정도 갔다", "오늘 중으로 거의 갈 것 같다" 등의 내용이었다. 부검을 통한 사망 추정 시각은 발견 전날부터 발견 당일 사이로 나왔다.
이 같은 메모 내용과 상식을 벗어난 현장 광경 때문에 초기에는 타살 가능성과 음독 가능성이 함께 제기됐다. 그러나 부검 결과 독극물은 검출되지 않았고, 대신 신경안정제 성분인 하이드라민이 발견됐다. 시신 모두의 사망 원인은 경부 압박에 의한 교살이었으며, 저항 흔적은 전혀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의 결론 "자의적 타살"
조사 결과 사망자들은 스스로 멀미약과 신경안정제를 복용해 정신이 몽롱해진 상태에서 서로의 목을 조여 사망에 이른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른바 '자의적 타살'이다. 사망자 32명 중 남성은 공장장 등 4명뿐이었고, 박순자 본인을 포함한 나머지는 모두 여성이었다. 경찰은 박순자가 먼저 공장장 이경수에게 자신을 교살하도록 했고, 뒤이어 이경수 등 남성들이 여성들을 교살한 후 박순자의 두 아들이 철골 서까래에 줄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마지막으로 이경수가 목을 매 자살한 순서로 사건이 진행됐다고 판단했다. 이날 공장에 모였던 80명 중 천장으로 올라가지 않은 48명은 공장 벽 뒤에 숨어 있다 경찰에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미제로 남은 의문, 세월호로 재조명
사망 정황은 규명됐지만 이들이 왜 집단으로 목숨을 끊는 방식을 선택했는지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고, 경찰은 사건의 열쇠를 쥔 오대양 직원 11명을 공개수배했다. 1991년 7월 수배 중이던 직원 6명이 자수하면서 대전지방검찰청에서 재수사가 이뤄졌으나, 검찰 수사 결과도 1987년 경찰 수사와 마찬가지로 32명의 집단 자살 사건으로 결론이 났다.
이 사건은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다시 한번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세월호 실소유주였던 유병언이 과거 박순자와 함께 구원파 활동을 했던 인물로 지목되면서, 언론 보도를 통해 오대양 사건과 구원파의 연결고리가 재조명됐다. 이 과정에서 오대양과 구원파를 둘러싼 자극적인 보도가 이어졌고, 정작 규명돼야 할 다른 쟁점들이 묻혔다는 지적도 함께 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