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취임 한 달 만에 151명 살해당해... 페루 "60일간 비상사태"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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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 붕괴 페루, 60일 비상사태 재선포 이유
후지모리 대통령 철권 공약이 안 먹히는 까닭

페루 정부가 강력 범죄와 총기 살인이 잇따르는 수도 리마 광역권과 인근 카야오주(州)에 60일간의 비상사태를 다시 선포했다고 페루 일간 라레푸블리카와 엘코메르시오 등이 28일(현지시각) 보도했다.

게이코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서명한 이번 조치는 리마 광역권과 카야오 지역의 강도 높은 치안 개입을 위해 마련됐다. 직전 비상사태가 27일 만료된 데 따른 후속 대응이다.

수천 명의 페루 시민이 리마 거리로 나와 급증하는 폭력 범죄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알자지라 잉글리시' 유튜브 영상 캡처
수천 명의 페루 시민이 리마 거리로 나와 급증하는 폭력 범죄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알자지라 잉글리시' 유튜브 영상 캡처

이번 조치로 경찰과 군이 합동 순찰과 검문을 이어가게 된다. 비상사태 기간 페루 국가경찰(PNP)은 정보 분석과 각종 지표, 범죄 지도 등을 근거로 집중 개입 지역을 지정한다. 정부는 경찰과 군, 정보기관, 재정 담당 부서, 교정 당국 관계자로 구성된 정보위원회를 신설해 대응을 조율하도록 했다.

비상사태 기간에는 헌법이 보장하는 일부 기본권이 제한·정지된다. 주거의 불가침권을 비롯한 여러 헌법적 권리가 제한되며, 이를 통해 영장 없이도 신속한 수사와 검거가 가능해진다.

대통령 취임 첫 달에만 살인 151건

후지모리 대통령이 국정을 맡은 뒤에도 폭력 사태는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페루 국가사망정보시스템(SINADEF) 자료를 토대로 데이터 분석가 후안 카르바할이 집계한 결과 후지모리 대통령이 취임한 지난달 28일부터 지난 24일까지 페루 전역에서 살인 151건이 발생했다. 이 가운데 114건이 총기에 의한 것으로 전체의 75.5%를 차지했다. 리마는 48건으로 살인이 가장 많이 집중된 지역으로 나타났다.

수치를 넓혀 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지난해 페루에서는 2400건의 살인이 벌어졌다. 하루 평균 7명 가까이 목숨을 잃은 셈. 같은 기간 갈취 신고는 2만5000건을 넘었다. 미주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은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신고된 갈취 범죄가 6배로 늘었고, 2025년 기준 페루인 3명 중 1명이 갈취 피해자를 알고 있다고 답했으며, 살인 역시 2019년 이후 두 배로 늘었다고 분석했다.

페루의 치안은 왜 이 정도로 무너졌나

전문가들은 페루 치안 붕괴의 뿌리를 단일 사건이 아닌 구조적 요인에서 찾는다.

첫째는 조직범죄의 급성장이다. 갈취가 이제 리마 도심을 넘어 서민 경제 전반을 파고들었다. 특히 대중교통 업계가 표적이 됐다. 버스 운수업체에 대한 갈취가 도시 폭력의 주요 통로로 자리 잡으면서 운행 중 총격을 당한 기사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요금 수납원은 협박에 시달리고 운수업체 간부가 살해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페루 / 픽사베이
페루 / 픽사베이

둘째는 베네수엘라 출신 범죄조직 '트렌 데 아라과'의 확산이다. 이 조직은 2010년대 초 베네수엘라 토코론 교도소의 재소자 갱단에서 출발했다. 이후 베네수엘라 이주 경로를 따라 콜롬비아와 페루, 칠레 등지에 세포 조직을 만들며 세력을 넓혔다. 갈취와 이주민 밀입국 알선, 납치, 마약 밀매, 인신매매, 고리대금업 등에 관여하며 진출한 지역의 사정에 맞춰 범행 방식을 바꿔 왔다. 범행 장면을 담은 영상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려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방식이 이 조직의 특징으로 꼽힌다.

베네수엘라의 경제 붕괴와 대규모 이주는 이 조직에 자양분이 됐다. 경제 붕괴와 정정 불안으로 베네수엘라를 떠난 이주민은 770만 명을 넘어섰다. 이 조직은 국경의 비공식 통로에 검문소를 세우고 절박한 이주민들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돈을 뜯으며 국경을 넘나드는 갈취 수법을 다듬었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2023년 9월 토코론 교도소를 다시 장악하면서 근거지를 잃었지만 지도부와 국제 조직망은 그대로 살아남아 활동을 이어갔다.

페루 경찰 /     알자지라 잉글리시' 유튜브 영상 캡처
페루 경찰 / 알자지라 잉글리시' 유튜브 영상 캡처

셋째는 교도소가 범죄의 지휘 본부로 변질한 현실이다. 수감된 조직 두목들이 옥중에서 갈취와 살인을 지시하는 구조가 굳어졌다. 이번 비상사태에서 정부가 교정시설을 겨냥한 강도 높은 조치를 예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재소자들의 옥중 범죄 모의를 차단하기 위한 대책이 포함됐다.

넷째는 오랜 기간 누적된 제도의 부실이다. 애틀랜틱카운슬은 당국이 강력 범죄 단속에 집중하는 사이 위기의 근본 원인인 '10년에 걸친 제도의 쇠퇴'를 놓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2024년 9월에는 경찰이 수사에서 더 큰 역할을 맡고 검찰의 기능을 축소하는 법이 통과됐다. 당시 법률 전문가들은 이 조치가 수사 효율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권의 잦은 교체도 대응을 어렵게 만든 요인으로 꼽힌다. 후지모리 대통령은 지난 10년 사이 아홉 번째로 취임한 국가 원수다.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거나 탄핵·경질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일관된 치안 정책을 세우기 어려웠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버지의 그늘... '철권' 공약 내건 후지모리

51세인 게이코 후지모리 대통령은 1990년대 페루를 이끈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장녀다. 네 번째 도전 끝에 대선에서 승리해 페루의 아홉 번째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다. 그는 국민의 직접 선거로 뽑힌 첫 여성 대통령이기도 하다.
게이코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 / 후지모리 대통령 X
게이코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 / 후지모리 대통령 X

게이코 후지모리 대통령은 6월 결선투표에서 좌파 성향의 로베르토 산체스 후보를 5만 표 미만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다. 그의 승리는 콜롬비아, 칠레의 우파 후보 당선과 맞물려 남미의 보수 회귀 흐름을 뚜렷이 드러냈다.

아버지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의 유산은 게이코 후지모리 대통령에게 자산이자 부담이다.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1990년대 경제를 안정시키고 반정부 무장세력을 제압했다. 그러나 재임 중 군에 의해 자행된 인권 유린으로 뒤에 수감됐다. 그는 2023년 12월 사면된 뒤 이듬해 9월 사망했다.

게이코 후지모리 대통령은 아버지 시절의 강경책을 되살리겠다는 공약으로 지지를 끌어모았다. 선거운동 기간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의 정책 일부를 가져와 '철권'으로 범죄와 싸우겠다고 약속했다. 엘살바도르의 악명 높은 교도소 세콧(CECOT)을 본뜬 대형 교도소를 짓겠다는 구상도 내놨다. 형사재판에서 판사가 신원을 숨길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복면 판사' 제도를 도입해 판사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방안도 제시했다.

비판도 만만치 않다. 아버지의 통치 방식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게이코 후지모리 대통령의 정당 '민중권력'이 의회 영향력을 통해 수년간의 정치 불안에 일조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범죄 단속 공약이 시민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경계도 잇따랐다. 취임식 당일 리마에서는 그의 취임에 반대하고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숨진 이들에 대한 정의 구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에스쿠도 작전' 한 달... 성과는 미미

게이코 후지모리 대통령은 취임 직후 치안 공약의 실천에 나섰다. 지난 8일에는 대중교통 기사 살해와 버스·터미널 공격의 배후인 갈취 조직 소탕에 초점을 맞춘 '에스쿠도(방패) 작전'을 발표했다. 이 작전은 갈취와 도시 폭력이 집중되는 지점에 경찰과 군 병력을 배치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

페루인 / 픽사베이
페루인 / 픽사베이

그러나 작전은 출발부터 흔들렸다. 정작 보호 대상인 운수업계가 먼저 반발했다. 터미널과 정류장에 배치된 병력이 실제 공격이 벌어지는 노선과 길목, 비공식 정류장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병력 배치가 실질적 작전이라기보다 전시성에 가깝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갈취에 시달리는 운수업계는 지난 25일 리마와 카야오에서 전국 규모의 운행 중단을 예고했다. 정부와의 협의로 파업은 철회됐지만, 갈취에 대한 정부 대응이 미흡하다는 불만은 가시지 않았다.

성과 지표는 어떨까. 취임 후 16일 동안 살인 97건이 발생해 하루 평균 6명이 숨졌고, 이 가운데 76%가 총기에 의한 것이었다. 첫 달 전체로는 살인 사건만 151건에 이르렀다. 치안을 최우선 공약으로 내세운 정권으로서는 뼈아픈 수치다.

카를로스 바솜브리오 전직 내무장관은 짧은 기간에 살인율을 낮추겠다는 약속 자체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살인을 줄이는 일은 대단히 복잡한 과제인 까닭에 수년에 걸쳐 심각하게 악화한 현상을 몇 달 만에 해결하겠다고 국민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제대로 된 방식으로 접근하면 일부 진전은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게이코 후지모리 대통령 정부는 치안과 조직범죄 대응 등 66개 분야에서 120일간 법률을 제·개정할 수 있는 입법 위임 권한을 의회에 요청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지난 27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돼 다음날인 28일 의회로 넘어갔다. 위임 권한 없이는 행정부의 신속한 입법 대응에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