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게 죄가 되나요?"
2015-07-24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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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퍼레이드 슬로건 / 퀴어문화축제 공식 홈페이지 '사랑하라 저

'사랑하라 저항하라' 얼마 전 열린 2015 퀴어 퍼레이드의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을 마냥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 있다. 양성애자들이 그렇다.
'양성애자(Bisexual)'란 남성과 여성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국내에서 양성애자는 LGBT 즉 레즈비언(Lesbian)·게이(Gay)·바이섹슈얼(Bisexual)·트랜스젠더(Transgender)포괄적으로 다룰 때 특집으로 다뤄진 경우는 있지만, 양성애 맥락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 것은 극히 드물다.
지난해 3월 양성애자 모임인 '바이모임'에서 '바이섹슈얼 웹진' 첫 호를 발간하며 점차 성소수자 속 성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모이고 있다.
그러나 양성애자 여성 30대 A 씨는 "저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지만, 정작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모두에게서 외면당하기도 한다"라며 현실 속 차별을 털어놨다.

태풍이 오는 듯 마는 듯 날이 찌뿌둥한 주말 어느 날 홍대 인근 카페에서 여성 양성애자 A, B, C 씨를 만났다.
A 씨는 자신을 30대 후반의 자영업자라 소개했고, B 씨는 30대 중반의 회사원, C 씨는 20대 후반의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공통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던 이들은 모두 양성애자 모임에서 만나 친해진 사이라고 했다.
필자가 처음에 기자 신분을 밝히고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이들은 거부감을 표현했다. "동물원 속 원숭이처럼 본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끈질긴 설득 끝에 그들과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커플들이 참 많네요. 부러워요"
A 씨가 창밖으로 손을 잡고 지나가는 이성 커플을 보며 말을 꺼낸다. 이에 B 씨가 "길 건너에는 이쪽 커플(동성 커플)도 보인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들은 동성애를 '이쪽'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을 듣던 C 씨는 "레즈비언은 손을 잡고 걸어다닐 수라도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남자 둘이 손을 잡고 걸어 다녔다가는 어휴..."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날은 남성 양성애자 D 씨와 그의 남자친구도 오기로 돼있었지만, 그들은 끝내 시선이 두렵다며 면대면 인터뷰를 거절했다. 대신 친구인 이들을 통해 D 씨 이야기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되나요?"
필자와 인터뷰이 모두가 서로에게 물은 질문이다. 필자는 남자와 여자 모두를 좋아하는 게 더 힘들다는 내용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고 양성애자들은 제3자 입장에서 듣고 싶다며 필자에게 되물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A 씨는 이성애자로부터 겪었던 황당한 경험을 들려주었다.
A 씨는 "남자친구에게 '사실 나는 양성애자야' 라고 고백했을 때 그의 반응은 생각보다 괜찮았어요. 흔쾌히 받아들이더라고요"라고 운을 뗐다. 이후 A 씨는 성정체성으로 인한 갈등 없이 한동안 남자친구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A 씨는 황당한 요구를 받게 됐다. 남자친구가 또 다른 여성과 함께 성관계를 제안한 것이다. A 씨는 "남자친구는 저보고 '너는 여자와 남자 모두를 좋아하니 성관계도 가능할 것이 아니냐'며 쓰리섬(세 명이서 맺는 성관계)을 제안했다"라며 자신이 이를 거부하자 남자친구는 왜 안 되는 것이냐며 화를 냈다고 했다.
이후 남자친구는 A 씨에게 "여성도 사귀었으니 더럽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잦은 비난을 퍼부었고 이 문제로 갈등을 겪던 두 사람은 결국 헤어졌다.
A 씨는 성관계의 경우 자신의 사례가 일반적이지는 않겠지만, "더럽다"라는 말은 종종 듣는다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남성의 경우 상황은 더 심각했다. B 씨는 남성 양성애자인 D 씨가 겪었던 일을 조심스럽게 꺼내놨다.
D 씨는 짝사랑하던 한 남성에게 마음을 고백했다가 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그가 짝사랑하던 남성은 극도의 호모포비아(동성애자 혐오자)였고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레즈비언은 이해라도 되지 너는 도대체 뭐하는 XX냐"라고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했다.
D 씨는 몸 보다는 마음의 상처가 커 한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고 지내다 현재 남자친구를 만나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D 씨의 남자친구 역시 D 씨와 같은 남성 양성애자다. D 씨는 "차라리 같은 양성애자를 만나는 게 서로를 이해하고 속이 편하다"라고 전해왔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끼리 손을 잡고 길거리를 다니는 것은 흔한 일로 그다지 시선을 끄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남성끼리 손을 잡고 다닌다면 여자고 남자고 이성애자고 동성애자(로 추측되는 사람들조차)도 신기한 듯 쳐다본다며 "자유롭게 손이라도 잡고 거리를 걸어 다녀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D 씨는 말했다.

B 씨는 일부 레즈비언 사이에서는 양성애자 차별이 더욱 심하다고 이야기를 털어놨다.
이른바 '배신자 낙인'. 양성애자는 여자도 남자도 사귈 수 있으니 여자를 사귀다 남자를 사귀면 배신자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 남자를 좋아할 수 있으면 남자를 좋아하지 왜 여자를 사귀어서 자신들에게 상처를 주느냐며 양성애자들을 만나기 꺼린다고 말했다. 여기서 상처라는 것은 헤어진 후 남자를 사귀는 것을 뜻한다.
B 씨는 말했다. "남자도, 여자도 좋아할 수 있는 건 맞지만, 성별을 골라가며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이어 "동성애자들이 가장 크게 내세우는 말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왜 죄가 되느냐'는 말인데 정작 양성애자를 차별하는 문화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린 C 씨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양성애자에 대한 거부감을 심하게 드러내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자신이 20대 중~후반 레즈비언들과 30대 중~후반 나이의 레즈비언을 만났을 때 반응이 사뭇 다르더라는 것이다. C 씨는 일부 레즈비언들이 나이가 들 수록 양성애자에 거부감을 더 표현하는 것에 대해 "아마도 나이가 많은 만큼 결별에 대한 상처도 있을 것이고, 결혼에 대한 압박 등도 있어서 남성에게 떠날 가능성이 있는 양성애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더 심한 것 같다"고 얘기했다.
반면 20대 또래 친구들의 경우 이를 쿨하게 받아들인다며, 단 친구를 사귈 때 먼저 자신이 양성애자라는 사실은 꼭 미리 밝힌다고 덧붙였다. 이유는 앞서 말한 '배신자 낙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공통으로 여성보다는 남성이, 이성애자보다는 동성애자들이 양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많은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성별 차이가 있는 이유로는 남성들이 레즈비언에 대해서는 여성보다 상대적으로 '성적인 판타지'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원인은 앞서 지목된 잘못된 성인물 영향과 함께 "남자는 남자가 특별한 감정(좋아하는 감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게 그냥 본능적으로 죽도록 싫은 것 같다"라는 직설적인 대답을 D 씨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동성애자들이 거부감이 많은 것에 대해서는 '배신자 낙인'과 함께 결별로 인한 트라우마를 꼽았다.
만약 사귀던 여성이 남성과 바람을 피우거나, 헤어지고 남성을 만났을 경우 떠나는 사람을 잡을 명목이 없어 고스란히 이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 통념상 여성과 남성이 만나는 것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붙잡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일종의 자격지심을 느끼기도 한다고 답했다. 이는 남성 양성애자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얼마 전 미국에서는 모든 주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됐고 우리나라에서는 김조광수·김승환 부부가 동성 간 혼인신고를 두고 소송을 벌이고 있다. 또 이하나·김경은 여성 커플 사례가 22일 위키트리에 소개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필자가 만난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날로 개선되고 있고 인권도 향상되고 있는 것은 좋지만 정작 자신들이 당당하게 설 자리는 이성애자 사이에도, 동성애자 사이에서도 없는 것 같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소수자 사이에서도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양성애자들
성소수자 인권 향상을 위한 단체인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측으로부터 양성애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단체는 현재 단체 내에서 특별하게 '양성애자'만을 위한 인권 향상 프로젝트나 활동 등은 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다만 "일부 동성애자 사이에서 양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고자 노력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또 "'바이모임'이라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형성되며 양성애자의 목소리가 모이고 있다"며 "또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SNS를 통해 자신의 성정체성(양성애자)을 밝히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라고도 덧붙였다.
실제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에 '바이섹슈얼' 혹은 '양성애자'라고 검색했을 경우 꽤 많은 커뮤니티 검색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그중에는 동성애자 커뮤니티에 양성애자가 흡수된 경우가 가장 많았고 양성애 단독 모임은 거의 노출되지 않았다.

"남자여서, 여자여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마음이 닿는 곳으로 갈 뿐이지요"
인터뷰가 끝날쯤 B 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어느덧 창밖에는 길어진 여름 해도 뉘엇뉘엇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