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도 사치스러운" 위재량의 노래

2015-11-11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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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엠미디어웍스미술관에서만 살 수 있는 힙합 앨범이 있다. '위재량의 노래'다.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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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만 살 수 있는 힙합 앨범이 있다. '위재량의 노래'다. 현대미술과 힙합, 시가 만난 작품으로 예술 및 음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은 현대미술가인 김기라 작가가 2011년 난지창작스튜디오에서 청소공무원으로 일하던 위재량 시인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시인의 시집 '가슴으로 우는 새'에 큰 감명을 받은 김기라 작가는 김형규 작가와 함께 협업해 음원과 영상을 제작했다. 노래는 힙합 뮤지션 MC 메타, 최삼, 넉살, 아날로그 소년 등이 위재량 시인의 시를 재해석해 다시 작사하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가슴을 후벼파는 듯 직설적이고 힘있는 가사로 조용히 인기를 얻고 있는 '위재량의 노래'. 최근 서울 영등포구 모 처에서 '위재량의 노래'의 주인공 위재량(61) 시인을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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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재량 시인은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타났다. 재킷에 단 노란 리본 배지가 눈에 띄었다.

시인에게 김기라 작가와 협업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 묻자 "난지창작스튜디오에서 입주 작가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김기라 작가가 5기로 입주를 하면서 알게 됐다"며 당시 작가에게 시집을 건네면서 작품으로 나오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작품에는 전혀 관여를 하지 않았다"며 "모두 김기라 작가에게 맡겼다"고 소탈하게 이야기했다.

이어 위재량 시인은 '어떻게 시를 쓰게 됐냐'고 묻자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쭉 해나가기 시작했다.

위재량 시인은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꿈은 시인이나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안이 어려워 고등학교에 갈 수 없었다. 배우기 위해 17살 때 무작정 서울에 온 위재량 시인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신문 배달, 시계 수리, 구두 수선 등이 그가 한 일이었다. 서울 광화문 체신부에서 사환으로도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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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에는 공무원 시험을 쳤다. 5급 을류 관리직(지금 9급)에 합격해 광주 전남대학교 인사과에 발령받았다. 하지만 7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나와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위재량 시인에게 삼선개헌 찬성표 5표를 받아오게 했다. 교내에서는 나이가 비슷한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위재량 시인은 "내가 어떻게 하느냐"며 사표를 냈다. 이 때 첫 시를 썼다. 친형의 갑작스런 죽음도 큰 충격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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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전남 장흥 집에 내려오자 어딜 가든 순경들이 따라붙었다. 이미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있었다. 고시를 치기로 마음먹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험에서 계속 떨어졌고 그러는 사이 5년이 훌쩍 흘렀다. 친구는 "9급이라도 보지. 먹고살아야지"라며 시인 몰래 9급 공무원 시험에 원서를 접수했다.

운명의 장난인지 위재량 시인은 다시 서울시 9급 행정직에 합격해 공무원 생활을 하게 됐다. 여러 동사무소를 거쳐 서울시 상계동에 발령받았다. 여기에서 다시 뜻하지 않은 일에 휘말리게 됐다.

위재량 시인은 "당시 상계동은 무허가 건물이 많았다. 무허가 건물을 철거를 하면 보상비가 나오는데 한 가구당 50만원을 줬다. 그런데 주인도 모르게 건축담당들이 가짜로 서류를 만들어 다 해 먹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철거를 당한 사람은 보상비를 못 받았다"고 말했다.

이후 보상비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청와대로 진정서를 냈고, 감사가 들이닥쳤다. 위재량 시인이 도장을 찍은 서류 한 장이 문제였다. 위재량 시인은 "기가 막히더라. 분명히 내 글씨가 아닌데, 도장은 내 것이더라. 전출입 한 건으로 보상비 50만 원이 나갔는데, 당사자는 (돈을) 못 탔더라. 나중에 보니 건축 담당이 칠십몇 건을 해먹었더라"고 했다.

이 일로 위재량 시인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판사는 "억울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공무원은 도장 하나로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맞지 않느냐"고 했다. 33살의 나이에 파면되고나자 전과자로 낙인찍혀 갈 곳이 없었다. 위재량 시인은 "리어카 행상부터 시작해, 아파트 건설, 경리, 야간 업소, 책 판매 별에 별것을 다해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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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세월이었다. 그러는 사이 5년이 흘러 자격 제한이 풀렸다. 금고 이상의 형 집행이 끝나고 5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은 공무원이 될 수 없었다. 먹고살기 위해선 공무원밖에 길이 없었다. 위재량 시인은 기능직 공무원 시험을 쳤다. 사무직 공무원은 나이 제한에 걸렸다. 마포구청 청소과에 발령받은 후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 가양하수처리장, 난지물재생센터, 잠실체육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등을 오갔다.

시인은 "난지도 하늘공원을 숱하게 올라갔다. 쓰레기 더미...파리 떼..말할 것도 없고.."라고 난지도 매립장에서 일하던 당시를 회상했다. 시인은 난지물재생센터에서 분뇨처리 일을 하면서도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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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가 좋다고? (원작 시)

(중략)

어찌할 수 없이

공짜판에 고삐 끄을려 가는 날이면

용수철처럼 치오르는 뜨거운 피를

가슴 깊숙이 밀어 넣을 수밖에 없는

공짜 같지 않은 공짜로 살아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다는 사람이 어디 나뿐이랴

그래도 공짜(公字)가 좋은 것이라고

튼튼한 줄 한 가닥 잡으려고 저리들 안달이고

출구도 없는 공짜판에 온 가족 목줄을 맡긴

실오라기만한 끈도 없는 최말단 공짜들은

출혈된 눈빛으로 제 3막의 커튼을 접어야 한다

시집 『가슴으로 우는 새』(2000) 중

파란만장한 삶. 위재량 시인에게 시는 살기 위해 꼭 써야만 하는 것이었다. 시인은 "시가 없었다면 아마 저는 못살았을 거다"라고 말했다.

시인에게 시가 예술 작품으로 나온 것에 대한 소감을 묻자 "내 부족한, 부끄러운 글이 단 사람에게라도 전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것이다. 글이라는 건 단 한사람을 위해서라도 쓰는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한다"며 "새로운 예술에 접목해 새롭게 도전한다는 게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또 시인은 앨범이 나온 뒤 달라진 점에 대해 "좀 더 좋은 언어들을 쓸 수 있도록 신경을 쓰게 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아직 시다운 시를 못 썼다"며 "더 비우고 더 버려서 진정한 시를 쓰고 싶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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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사람들이 사는 곳(원작 시)

때로는 가난이, 사랑이

죽음보다 더 큰 죄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는

골백번을 죽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사람으로는, 사람으로는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죽기 전에 피처럼 쏟아내고 싶다는 사람아

이곳은 숱한 사람들이

차마 말 못할 환장할 일 하나로

긴긴 밤 쓰러지게 끌어안고

남몰래 베갯머리 홍건이 적시기도 하고

더러는 신명나게 덩실덩실 춤도 추면서

소금저린 생채기 한 두개 쯤

황토빛 가슴속 깊이 무덤처럼 꼭꼭 묻어두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곳이어늘

사랑다운 사랑으로 한 목숨 댕겅 버리지도

가난다운 가난 한 번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사람아

무슨 아픔 그리 크다고 달빛 우련한 산모롱일

술취한 듯 홀로 걸어가고 있단 말인가.

시집 『가슴으로 우는 새』(2000)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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