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도구' 단두대에 대한 10가지 사실

2016-04-1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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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는 프랑스에서 발명된 사형 도구 가운데 하나다. '단두대' 구조는 간단하다. 나무

'단두대'는 프랑스에서 발명된 사형 도구 가운데 하나다. '단두대' 구조는 간단하다. 나무 기둥 두 개 사이에 사형수 목을 대면 날카로운 칼날이 떨어진다.

단두대 / wikipedia

프랑스 혁명으로 왕인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 이슬로 사라졌다.

혹자는 단두대에 대해 처형자 고통을 줄여주는 사형 도구라고 주장한다. 인도적인 사형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사형수 의식을 오랫동안 유지시키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다는 주장도 있다.

사형제가 폐지되고 있는 추세인 만큼 요즈음 단두대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의미로 단두대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스포츠 경기에 있어 하위 팀들의 경기를 '단두대 매치'라고 한다. 이 경기에서 지는 팀이 꼴등이 되기 때문에 그만큼 '살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JTBC '썰전'에서 전원책 변호사가 '단두대'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는 프로그램에서 나라를 잘 이끌지 못하는 정치인은 모두 '정치적 단두대'로 보내야 한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그는 정치 생명을 앗아가야 한다는 표현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 단두대는 흔히 기요틴으로 불린다. 이는 기요탱(Guillotine) 박사를 못마땅해하던 신문 기자때문에 불리게 됐다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 이하 wikipedia

단두대는 루이제트(louisette)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가 언젠가부터 기요틴으로 알려졌다.

기요탱은 사람 이름이다. 조제프-이냐스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박사다.

단두대가 기요탱으로 흔히 불리게 된 데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특히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한 신문 기자가 단두대에 대해 비꼬는 투로 기사를 작성했는데, 여기서부터 단두대는 기요탱으로 불리게 됐다.

기요탱이 단두대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기요탱은 단두대 설계에 대한 공은 크지 않았다. 그는 단두대에 대해 "(그나마) 인권이 보장되는 사형기구"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 덕분에 단두대가 사형 도구로 널리 사용된 것은 맞다.

단두대를 만든 사람은 외과 의사인 앙투안 루이(Antoine Louis)다. 기요탱은 단두대에 자신의 이름이 붙은 것을 억울해했다고 한다.

2. 목을 자르는 사형 방법은 원래 귀족의 특권

마리 앙뚜아네뜨 왕비 처형 직전

프랑스에서는 사형 방법이 크게 두 가지였다.

교수형과 참수형이다. 고통이 덜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은 귀족들은 참수형으로 집행됐다. 사형수 가족들은 사형집행인에게 단번에 사형을 끝내달라고 뇌물을 주기도 했다. 날카로운 칼로 한번에 집행하는 게 사형수에게 최소한의 고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단두대 역시 칼로 목을 자르는 방식의 사형 기구다.

기요탱은 사형수도 평등해야 한다며 사회적 신분과 직위와 관계없이 공평하고 고통이 덜한 방법으로 사형이 이루어져야 한다며 단두대를 사형 기구로 사용해야 할 것을 주장했었다.

3. 기요탱은 단두대에서 죽었다?

사실이다. 하지만 단두대 도입을 주장한 기요탱 박사가 아니다. 성이 기요탱인 다른 사람이다. 즉 동명이인이 단두대 이슬로 사라졌다.

기요탱 박사는 1814년 5월 26일 자연사했다.

pixabay

4. 원래 단두대 칼날 모양은 '반달 모양'이었다

publicdomainpictures.net

루이 16세가 칼날 모양을 기울어진 일자형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루이 16세는 칼날이 반달형일 경우 칼날이 목뼈에 걸려 쉽게 죽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모두가 알고 있는 모양의 단두대가 탄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한다.

5. 프랑스 국민들은 단두대 도입을 반대했다

pixabay

이유는 다른 사형 방법보다 '고통스럽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사형 집행은 하나의 오락거리였다.

프랑스 국민을 설득시킨 이는 사형집행인들이었다. 이들은 소수의 사형집행인으로는 처형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시민들을 설득했다.

6. 처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은 '펠르띠에(Nicolas-Jacques Pelletier)'

wikipedia

그는 절도범이었다. 1792년 4월 25일 사형이 집행됐다.

첫 단두대 사용을 보기 위해 그의 사형 집행에는 많은 구경꾼이 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의 목이 떨어지자 사람들은 불평했다.

6. 사형수는 집행 당하기 전 이런 부탁을 받고는 했다

giphy

"목이 잘린 다음 의식이 있으면, 눈을 깜빡여라"

해부학자들은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한다. 목이 잘린 뒤 바로 의식을 잃느냐 마느냐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다. 이를 두고 의학계에서는 지금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목이 절단되는 순간 바로 뇌활동이 정지돼 의식이 없어진다는 의견이 있다. 잔류 혈액으로 짧은 기간 의식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해부학자들은 사형 집행 후 시신을 가져가기 위해 사형집행자를 돈으로 매수하기도 했다.

7. 단두대는 편리성 때문에 이웃나라로 수출됐다

베트남 전쟁 때 사용됐다는 단두대 / wikipedia

신속하고 간단한 처형 방법 때문에 이웃 나라로 수출됐다.

독일, 벨기에, 스웨덴, 룩셈부르크 등이다. 아시아에서도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도 단두대가 사용됐다.

8. 독일 단두대는 프랑스 단두대와 구조가 달랐다

flickr

피형자를 엎드리게 해서 얼굴을 밑으로 가게 하는 프랑스식이 아닌, 피형자가 칼날을 똑바로 보도록 눕히는 방식으로 집행해서 죽음의 공포를 극대화 시켰다.

아돌프 히틀러는 기요틴을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 사용했으며 그 수만 약 1만 6500명으로 추산된다.

9. 프랑스는 비교적 최근까지 단두대를 사용했다

이하 pixabay

프랑스에서 단두대를 마지막으로 사용한 때는 1977년 9월 10일이다. 이후 프랑스는 1981년 사형제를 폐지했다.

10. 1996년 미국에서 단두대를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조지아주에서 사형 방법으로 전기의자 대신 단두대를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왔지만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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