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여성 독립운동가 6인 활약상

2016-07-27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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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하면 생각나는 이름이 몇 있다. 윤봉길, 이봉창, 안중근, 안창호, 김구...그

독립운동가 하면 생각나는 이름이 몇 있다. 윤봉길, 이봉창, 안중근, 안창호, 김구...

그런데 '여성' 독립운동가는 어떨까. 유관순, 유관순...유관순...... 다른 분들의 이름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여성 독립운동가 활약상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게 사실이다. 독립운동가를 다룬 영화·드라마가 수십 년간 수백 편 쏟아졌다. 하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 여성 캐릭터는 없었다. 영화 '암살(2015)' 주인공 안옥윤(전지현 분) 정도가 유일하다.

잊혀진 여성 독립운동가 6인과 이들의 활약상을 소개한다. 자주 헷갈리는 의사·열사·지사의 뜻도 적어봤다.

의사 : 무력으로써 항거해 의롭게 죽은 사람.

열사 : 맨몸으로써 저항해 자신의 지조를 나타낸 사람.

지사 : 나라와 민족을 위해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 산 사람에게도 쓸 수 있음.

출처 : 국가보훈처

1. 안경신(1888 ~ ?) 의사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

안경신 의사는 1888년 평안도 대동에서 태어나 평양여고보(여자보통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상해 임시정부(임정) 수립(1919년 4월 11일) 뒤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했다. 모집한 군자금을 임정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안 의사는 일제 발각으로 부인회 활동이 어려워지자, 무력 투쟁을 선택했다. 그는 1920년 8월 3일 무장투쟁단체 의용단 단원 6명과 함께 평남도청, 평남경찰서, 평양부청에서 폭탄 의거를 계획했다. 안 의사는 당시 임신 상태였다.

도청과 부청은 불발로 끝났지만, 경찰서에서는 폭탄이 터져 순사 2명이 사망했다. 안 의사는 이후 평양의 지인 집에 1년 가까이 몸을 숨겼다. 그러나 1921년, 대동경찰서 순사들이 안 의사의 은거지를 발각했다. 그는 재판에 넘겨져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다.

아쉽게도, 그 뒤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2. 남자현(1872~1933) 의사

Wikipedia

남 의사는 1872년 경북 안동의 석학(碩學) 남정한 슬하 3남매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제자였던 김영주에게 19살(1891년)에 시집갔다. 김영주는 의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라가 망해 가는데 어찌 집에 있겠느냐"며 경북 영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도현 휘하에 자진 입대했다. 김영주는 일제와 전투 중 전사했다.

졸지에 남편을 잃은 남 의사는 홀로 가정을 챙겼다. 명주를 짠 돈으로 외아들을 장성시키고, 시부모를 봉양했다. 1919년, 3·1운동으로 조국 독립의 열망을 깨달은 남 의사는 중국 요녕으로 건너가 항일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에 가입했다. 남편과 조국의 복수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의 나이 46살 때였다.

남 의사는 1925년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 암살을 계획하고,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 구출 작전에 참가하는 등 위험한 작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 교육 사업에도 힘썼다. 만주 일대에 교회를 건립하고, 여자 교육회를 설립해 여권신장에 기여했다.

남 의사는 1933년 일본 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암살하려다가 만주국 군경에 잡혀 투옥됐다. 그는 옥중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던 중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전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영화 '암살' 안옥윤(전지현) 역의 실제 모델로 알려졌다.

3. 윤희순(1860~1935) 의사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

윤 의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다. 1860년 경기 구리에서 태어났다.16세에 강원 춘천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1896년 머리를 강제로 자르는 조치인 '단발령'에 반대해 경기, 강원, 충청 등에서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윤 의사는 당시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며 의병에 참여했다.

1907년 고종이 일제의 협박에 못이겨 강제 퇴위하자 윤 의사는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화약 제조소를 만들고, 여성 의병 30명을 조직했다. 여성 의병들은 의병대 내 취사와 세탁을 맡고, 군사 훈련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윤 의사는 1910년 한일병탄조약으로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자, 중국에 망명했다. 그는 조선·중국인 항일연대단체인 '무순 조선독립단'을 만들어 일제와의 투쟁을 이어갔다.

윤 의사에게는 독립운동가 아들 유돈상이 있었다. 유돈상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5년 일본 경찰에 검거돼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윤 의사는 비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아들이 죽은지 11일 되던 날 결국 숨을 거뒀다.

4. 김마리아(1892~1944) 지사

연합뉴스

김 지사는 1892년 황해 장연군에서 아버지 김윤방과 어머니 김몽은의 3녀 가운데 막내 딸로 태어났다. '마리아'라는 이름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아버지가 지었다고 한다.

김 지사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셋째 삼촌은 도산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은 김필순이었고, 셋째 고모는 김규식 선생 부인 김순애였다. 김 지사는 경성 정신여학교(지금의 서울 잠실 정신여고)를 졸업하고, 전남 광주(지금의 광주광역시) 수피아 여학교 교사로 내려가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전파했다.

김 지사는 한일병탄(1910) 뒤 서울로 올라왔다. 모교인 정신여학교로 돌아갔다. 1915년, 일본으로 유학한 김 지사는 4년 뒤인 1919년,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다.

김 지사는 임정 설립(1919년 4월 1일) 후 기독교 여성 신자들과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조직해 후원 활동을 벌였다. 주로 임정에 군자금을 모집, 전달했다. 김 지사는 이 와중 일제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20년, 김 지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거기서 독립운동단체 '근화회'를 조직했다. 13년 뒤, 국내로 돌아온 김 지사는 평양 원산의 윌슨(Wilson) 신학교 교사로 부임해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김 지사는 1944년 고문 후유증 재발로 평양기독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5. 박차정(1910~1944) 의사

이하 국가보훈처 공식 블로그

"조선에서 자란 소년들이여. 가슴이 피 용솟음치는 동포여. 울어도 소용없는 눈물 거두고, 결의를 굳게하여 모두 일어서라. 한을 지우고 성스러운 싸움으로 필승의 의기가 여기에서 뛴다"

박 의사는 1910년 부산 동래에서 3남 2녀 가운데 셋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일병탄(1910년) 뒤 일제의 전횡에 분노해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박용한이다. 어머니는 당대 유명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 약수 김두전, 김두봉과 육촌·사촌 지간인 김맹련이다.

부산 동래일신여학교(지금의 동래여고)를 졸업한 뒤, 1929년 민족주의 여성단체 '근우회'에서 활동했다. 이 떄 박 의사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 차별 일제 철폐, 봉건적 인습과 미신 타파·인신매매, 공창의 폐지 등 당시로는 혁신적 주장을 내세우며 여권신장의 초석이 됐다.

근우회 활동으로 잠시 구속된 박 지사는 1930년, 오빠 박문호를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다. 거기서 약산 김원봉을 만나 평생의 연을 맺었다. 그는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을 따라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다. 또 중국 내 독립운동세력을 모아 '조선민족전선연맹(조민련)'이라는 만드는 데 힘을 보탰다.

박 의사는 조민련 산하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하던 1939년, 중국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뒤, 5년이 지난 1944년.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6. 박자혜(1895~1943) 지사

박 지사는 1895년 경기도 고양군(지금의 고양시)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궁중 나인으로 생활했다. 나인은 왕과 왕비의 수족을 챙기는 신하로, 환관과 비슷한 개념이다.

박 지사는 1910년 일제가 한일병탄으로 조선 궁중을 없애며 궁녀 신분을 벗었다. 그는 같은 해 숙명여학교(지금의 숙명여대) 입학해 졸업 후 조산부(조산사)양성소를 다녔다.

조산사 자격증을 딴 박 지사는 조선총독부 의원 산부인과에 취업해 3년 가까이 간호사로 근무했다. 박 지사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부상을 입은 조선인들을 치료하며 민족의 참상을 자각했다.

박 지사는 3·1운동 후 3개월간 이어진 만세운동에서 간호사들과 함께 '간우회'를 조직해 적극 참여했다. 그는 그 해 일제 경찰에 구속돼 유치소에 갇혔다가, 총독부 소속 간호사라는 신병을 확인받고 풀려났다. 그 길로 경성을 떠나 중국 북경의 연경대 의예과에 입학했다.

북경 생활 1년째가 되던 1920년, 단재 신채호를 만나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생활이 궁핍해지자 신채호는 박 지사를 경성으로 되돌려보냈다. 1922년이었다.

박 지사는 경성(지금의 서울) 인사동에 산파소(산부인과)를 열고 조산 업무를 했다. 신채호의 부인이라는 이유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 감시와 폭력은 일상이 됐다. 신채호 선생이 중국 현지에서 일제 경찰에 잡혀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자, 후원금을 모집해 옥바자리에 힘썼다.

경성에는 궁핍한 생활이 반복됐다. 1936년, 엎친데 덮친격으로 신채호마저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박 지사는 크게 낙담하여 당시 "이제 모든 희망이 아주 끊어지고 말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박 지사는 1943년 홀로 셋방살이를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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