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블루레이 시대... '천 장 미만' 한정판 출시 돌파구 될까

2017-04-2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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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워너 브라더스 등 대형 영화사는 일반판 블루레이를 주로 만든다. / 셔터스톡 차세

디즈니, 워너 브라더스 등 대형 영화사는 일반판 블루레이를 주로 만든다. / 셔터스톡

차세대 저장 매체로 주목받던 블루레이(Blu-Ray) 시장이 급격히 축소되고 있다. 블루레이는 최대 50GB 용량 데이터를 담을 수 있는 광 매체다. 영상과 사운드를 최고 품질로 볼 수 있는 매체로 꼽힌다.

2000년대 후반 블루레이는 몰락하는 DVD를 대체할 것이라는 기대를 받으며 등장했다. 그러나 블루레이도 인터넷 다운로드와 IPTV 성장세를 막을 수 없었다. 지난해에는 넷플릭스, 왓챠플레이 같은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가 등장하며 블루레이 시장을 잠식했다.

영상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16년 한국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블루레이·DVD 등 패키지 시장은 지난해 99억원 규모로 2015년(158억원)에 비해 무려 37.3%나 감소했다. 지난 5년 기간 동안 최고 감소율이었다.

패키지 시장 규모 (2012년~2016년) / 영상진흥위원회 '2016년 한국영화산업 결산'

입지가 점점 좁아지자 국내 블루레이 업체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왔다. 대표적인 게 영화마니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블루레이 '한정판'이다.

한정판 블루레이는 보통 1000장 내외로 생산된다. 영화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의 한정판 블루레이를 사기 위해 지갑을 기꺼이 연다. 이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DVD 프라임, 익스트림 무비 등에서 활동하며 블루레이 인증샷을 올리거나, 블루레이 발매 정보를 공유한다.

디즈니, 워너 브라더스 등 대형 영화사는 일반 소비자층을 목표로 '일반판 블루레이'를 직접 제작해 판매까지 한다. 한정판 블루레이는 규모가 작은 국내 블루레이 업체들이 영화사에게서 판권을 받아 제작한다. 보통 작품성을 인정받은 상업 영화, 독립·예술 영화인 경우가 많다. 마니아를 타깃으로 했기 때문이다.

국내 한정판 블루레이 시장을 선도하는 업체로는 플레인 아카이브(이하 플레인)가 제일 먼저 꼽힌다. 비슷한 시기에 콘텐츠 게이트, 노바미디어, 다일리 컴퍼니 등이 한정판 블루레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지난 3월 플레인은 영화 ‘캐롤’(2015) 디럭스 박스를 1350개 한정으로 출시했다. 디럭스 박스는 배지, 한국어판 각본집, 포토북, 에세이북 등으로 구성됐다. 가격은 7만 5900원이다. 일반적으로 2~3만 원대인 일반판 블루레이보다 두 배 넘게 비싸다.

플레인 아카이브에서 출시한 '캐롤' 디럭스 박스 / 트위터 이용자 제이치 제공 = 위키트리

‘캐롤’ 디럭스 박스에 대한 예약 판매가 시작된 지난 2월 23일, 플레인 홈페이지는 많은 접속자 때문에 서버가 다운됐다. 순식간에 품절됐다. 블루레이 업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대박'이었다.

한정판 블루레이 매력은 무엇일까. ‘캐롤’ 디럭스 박스를 샀던 트위터 닉네임 '제이치'(남·31)는 한정판 블루레이를 자주 사는 영화팬이다.

'제이치'는 영화관에서 ‘캐롤’을 처음 볼 때부터 블루레이를 사려고 했다고 밝혔다. 그는 “영화 팬이라면 좋아하는 영화와 관련한 ‘굿즈’(상품)를 갖고 싶기 마련이다”고 말했다.

영화 팬들이 한정판 블루레이를 살 때 제일 먼저 보는 것은 패키지 디자인과 구성품이다. 7년째 블루레이를 모으고 있는 장모(여·31)씨는 “구성품을 주로 본다. 그래도 제일 먼저 보는 부분은 아트웍(artwork) 디자인이다”라고 말했다. '제이치'는 “한정판을 사는 이유는 더 예쁜 패키지와 아트웍이 있는 블루레이를 갖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2000장 수량으로 나온 '올드보이' 스틸북 한정판. 벨기에 일러스트레이터 로렌 드류(Laurent Durieux)가 '올드보이' LP를 위해 그린 일러스트를 다시 사용했다. / 플레인 아카이브

블루레이 업체들은 한정판 블루레이가 성공하는 조건으로 ‘소장 가치가 있는 콘텐츠’를 꼽았다. 아트웍 디자인이나 구성품도 중요하지만 역시 영화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콘텐츠 게이트 한정환 대표는 “흥행을 떠나 소장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작품의 블루레이가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개봉 당시 관객 약 8만 명을 동원한 ‘로스트 더 더스트’(2016)가 한정판 블루레이로 출시되자 2000장 이상 판매됐다고 전했다.

노바미디어 김동권 과장도 ‘콘텐츠’라고 말했다. 노바미디어는 마블 영화 블루레이를 꾸준히 출시하고 있다. 김 과장은 “액션 영화들이 판매율이 높다. 마블 영화는 가장 사랑받는 콘텐츠”라고 했다.

콘텐츠 게이트에서 출시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 한정판 블루레이. 콘텐츠 게이트에서 나온 한정판 블루레이는 '더 블루'라는 레이블 이름으로 나온다. / 콘텐츠 게이트

노바 미디어에서 출시한 '나이트 크롤러' 한정판 블루레이 / 노바미디어

블루레이 업체들은 '한정판 블루레이'가 늘어나는 추세에 대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노바미디어 김동권 과장은 “시장이 축소되다 보니 1000장 이하 한정판이 만들어진다. 1000장도 소화하기 어려울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정판 판매 후 일반판 출시로 판매를 조금 더 늘리려는 마케팅 전략도 있다”고 했다.

한정판 블루레이 시장이 블루레이 시장에 작은 활력을 불어넣고 있지만, 업계는 블루레이 시장 전망을 어둡게 보고 있다. 한정판 블루레이가 패키지 시장 하락세를 막을 수 없을 거라는 얘기다.

김동권 과장은 “(노바미디어) 매출이 매년 10~15% 감소했다. 최근에는 그 감소세가 더욱 커지고 있다”고 했다. 콘텐츠 게이트 한정환 대표는 “성장 가능성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하지만 이보다 더 떨어질 일도 없어보인다”고 했다.

‘바스켓볼 다이어리’(1995), ‘고백’(2010) 등 한정판 블루레이를 꾸준히 내놓던 다일리 컴퍼니는 “현재 사업 부진으로 휴식기에 있다”며 취재 요청을 완곡히 거절했다. 다일리 컴퍼니는 지난 1월 이후 3개월 넘게 신작 블루레이를 내지 않고 있다.

블루레이 케이스 / 셔터스톡

전문가들은 한정판 블루레이가 늘어나는 현상 자체가 블루레이 시장 종말을 예고하는 것과 같다고 진단했다.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영상이론 전공)는 블루레이만이 가진 장점이 사라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온라인 유통 시스템 영상물의 품질은 계속 높아진다. 블루레이가 자랑하는 지점인 '고화질 영상'은 블루레이 아니고도 점점 더 보편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 교수는 영화팬 이외에 사지 않는 블루레이 낮은 보급률도 이유로 들었다. 그는 “블루레이는 이제 유통 개념이 아니라, 도서관에 있는 책처럼 하나의 수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죽은 매체’를 수집하는 마니아들에게 미래를 위한 투자 대상이다”라고 했다. 남 교수는 “넷플릭스 앞에서는 블루레이도 비디오테이프, DVD와 같은 운명을 따르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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