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년 전 오늘(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2017-11-17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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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은 일본이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한 조약이다.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 중개를 거치지 않고서는 국제적 성질을 지니는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도 맺지 않을 것을 약속함"
112년 전 오늘, 한국은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겼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 제국과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을사늑약은 일본이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한 조약이다. 제2차한일협약, 을사5조약이라고도 부른다.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을 살려 '을사늑약'이라고 부르자는 의견이 많다.
앞서 1904년 2월 8일 러일 전쟁이 발발했다. 러시아와 일본 양국이 한국에서 주도권을 쟁취하기 위해 벌인 전쟁이었다. 2월 23일 일본은 대한 제국을 압박해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한일의정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세력권에 넣기 위해 제안한 외교문서다.
그해 8월 22일 일본과 대한제국은 제1차한일협약을 체결했다. 대한제국이 일본인 1명을 재정 고문으로 해야 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정식 명칭은 '한일 외국인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다. 일본은 제1차한일협약을 바탕으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일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은 식민지 만들기에 앞서 서양 열강 승인을 받는 데 주력했다. 1905년 7월 27일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8월 12일에는 영국과 제2차영일동맹을 맺었다. 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9월 5일에는 러시아와 미국 포츠머스에서 강화 조약을 체결했다.
11월 10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는 고종(1852~1919)을 만나 일본 왕 친서를 내밀었다.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고종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1월 15일 이토 히로부미는 덕수궁 중명전에서 고종을 다시 만났다. 고종은 조약에 서명할 수 없다며 강경하게 저항했다.
11월 16일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 대신 대신들을 포섭하기로 했다. 그는 대한제국 대신들을 손탁 호텔에 초대해 점심을 대접했다. 이후 그는 일본 군대를 궁궐 주변에 배치했다.
11월 17일 조정 대신들은 회의를 열었다. 대신들은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이때 이토 히로부미가 들어왔다. 그는 대신들에게 조약 체결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탁지부대신 민영기(1858~1927), 참정대신 한규설(1856~1930)은 조약 체결을 반대했다. 훗날 한규설은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참여했다. 민영기는 일제에 협력해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총재가 됐다.

학부대신 이완용(1858~1926), 군부대신 이근택(1865~1919), 내부대신 이지용(1870~1928), 외부대신 박제순(1858~1916), 농상공부대신 권중현(1854~1934)은 조약 체결을 찬성했다.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부른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대한 제국은 국제적 고립 상태가 됐다. 이후 통감부가 설치됐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11월 20일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1864~1921)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날을 목놓아 통곡한다"라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