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들의 밤' 김보람 감독 “당신은 들을 준비가 되었나요” (인터뷰)

2021-09-2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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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내에서 발생한 성범죄 문제 다룬 영화 '자매들의 밤'
“가치판단으로 사건의 시비를 가리지 않길 바랐다”

피해자들에게 절실한 건 '말 좀 해 보라'는 재촉이 아니라 들을 준비가 된 귀다. '그건 피해라고 보기엔 좀 애매하지 않아?', '왜 그 때 진작 말하지 않았어?' 같은 시선들은 더욱 피해자들을 주눅들게 한다.

영화 '자매들의 밤'(2020)에서 김보람 감독은 막내 정희(오지영)와 맏이 혜정(강애심), 그리고 다른 자매들을 통해 피해자들이 처한 답답한 현실을 그려냈다. 과장도 생략도 없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 작품은 그래서 더 날카롭다. 최근 CJ문화재단의 단편영화 지원 사업인 '스토리업 쇼츠'를 통해 일반 관객들에게 공개된 이 작품의 감독 김보람을 위키트리가 만났다.

이하 영화 '자매들의 밤' 스틸
이하 영화 '자매들의 밤' 스틸

-'스토리업 쇼츠'로 관객을 만난 소감?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상영회에 가지 못 했다. 정말 아쉽다. 상영을 위해 애써 준 분들께 감사드린다."

-'자매들의 밤'에서 막내 정희는 끝까지 자신이 큰오빠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 이유가 있을까.

"시나리오 초고에는 대략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에 대한 막내 저의의 대사가 있었다. 그 부분이 어떻게 해도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 번 수정했는데 둘째 지숙 역을 맡아 준 남미정 배우가 첫 미팅에서 '굳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언급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야 나도 비슷한 일이 언론에 소개될 때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건 피해 당사자의 입장이 아니라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는데?'라는 사실 관계라는 걸 떠올렸다. 그 사실 관계를 구체화시키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겨우 그런 일 가지고?', '성폭력이라고 보기엔 애매한데?', '예민하다' 등 자신의 가치 판단을 투영해 사건의 시비를 가리려는 욕망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 또한 그들 가운데 하나였고. 이 영화의 핵심은 '그래서 당신은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인 만큼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영화에 넣는 건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공간이 큰 언니의 집 안 딱 한 곳으로 단조롭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처음에는 정말 현실적인 이유였다. 영화를 배운 적이 없고, 단편이지만 첫 극영화였기 때문에 모르는 게 많았다. 야외 촬영이나 통제되지 않은 공간에서 중년 배우 선배들을 모시고 촬영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애초에 시나리오 초기 단계부터 집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로 설정하고 이야기를 구축했다. 그래서 화장실 장면, 지숙이 전자담배를 피우는 설정이 들어가게 됐다.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오는 장면에서 중간중간 외부 장면이 나오고, 이를 통해 주인공 혜정의 내면으로 외부에서 자극이 들어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이 시나리오에 잇었는데, 촬영 기간에 엄청난 태풍이 와서 도저히 문을 여는 장면을 찍을 수 없었다.

영화를 다 만들고 나서 안 사실인데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찍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라고 하더라. 굉장히 어려운 일인 것을 모르고 진행했기 때문에 편집 과정에서 애를 많이 먹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영화라는 장르를 잘 이해하지 못 하고 시도한 것들 때문에 아쉬운 점이 많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막내는 언니의 귀에서 나온 먼지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희는 언니를 미워한 적도, 원망한 적도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지난 몇 년 간 어떤 시간을 통과하면서 상담 치료도 받고 내면을 단단하게 다져온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정희 입장에서는 오히려 가부장제 가치관과 편견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언니가 안스럽고, 언젠가 언니도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하길 바랐을 것이다. 언니의 귀를 막고 있던 먼지가 터져 나오는 것은 세상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도록 하는 자유의 첫 걸음 정도일 것 같다. 아마 정희는 반가웠을 것도 같다."

-추석 연휴는 어떻게 보낼 생각인지.

"얼마 전에 큰 마음을 먹고 굉장히 마음에 드는 작업실을 구했다. 내 형편을 넘어서는 시도였다. 몇 년 동안 집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한계에 부딪혔고,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석 연휴에는 새로운 작업실에서 작업을 할 계획이다."

-차기작 계획은 없는지.

"지난 5월에 단편영화 '내 코자 석재'를 만들었고, 이 작품이 국내·외 영화제들을 통해 소개되고 있다. 지난 2019년부터 찍기 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후반 작업도 함께 진행하고 있다. 또 장편 극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 다행히 올해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진행하는 장편 영화 시나리오 랩 프로그램에 선발돼서 지금 시나리오 개발을 하고 있다."

home 정진영 기자 story@wikitr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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