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다방 더클래식] 고전 중의 고전 '성악의 최고봉' 엔리코 카루소

2022-05-17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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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너의 대명사 역사상 최초의 슈퍼스타
음반 사상 최초로 100만 장 팔려

“세상 모든 익숙함에서 벗어나 낯선 것을 받아들여라”

한 시대 오피니언 리더들의 고민과 고뇌의 장을 현재로 옮겨, 의견을 나누고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토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제비다방'은 1930년대 구한말 지식인들의 고뇌와 토론의 장이었던 시인 이상의 다방 이름에서 가져왔습니다.

"클래식은 삶을 변화시킨다"

'제비다방' 첫 번째 시리즈는 <더 클래식>입니다. 프라이부르크 국립음악대학원을 졸업하고 뮌헨 국립 오페라단 전속 솔리스트를 거친 클래식 음악 전도사 안우성 지휘자와 함께합니다.

‘신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테너를 만드셨다’는 말이 있다.

테너는 그만큼 특별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 특별함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전설의 테너'가 있다.

가끔 '제일 유명한 오페라가 무엇이고, 세상에서 제일 잘하는 바리톤은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다.

묻는 이의 취향도 제각각이거니와 무수한 세월을 거치며 깊게 뿌리내린 수많은 마스터피스들과 대가들 사이에서 단 하나만을 추려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테너가 누구냐는 질문에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할 자신이 있다. 나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성악가에게 묻더라도 대답은 언제나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21)다.

이하 유튜브. '제비다방'
이하 유튜브. '제비다방'

쓰리테너(파바로티, 카레라스, 도밍고)의 전 세대이자 카루소보다 17년 늦게 태어난 전설의 테너 베니아미노 질리 (Bniamino Gigli 1890~1957)는 누가 카루소의 후계자가 될 것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카루소의 후계자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탈리아, 아니 전 세계의 성역인 그의 무덤을 모욕하는 것이다.”

노래하는 중 문제점을 발견하면 늘 카루소의 레코딩에서 답을 구했다는 '오페라의 제왕' 플라시도 도밍고(Placido domingo) 역시 이런 말을 남겼다.

"나에게 훌륭한 테너가 누구냐고 물어온다면 여러 명의 테너를 들 수 있다. 하지만 테너로서의 모든 것을 갖춘 이는 오로지 한 명뿐, 모든 테너에게 신으로 존재하는 엔리코 카루소이다."

유튜브, '제비다방'

"그의 음량, 표현력과 파워는 신으로부터 온 것이다. 결코 우리가 후천적 노력으로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클래식 음악을 크게 두 갈래로 나눈다면 기악과 성악이다. 그 양대 산맥 중 성악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는 이가 카루소다.

그 누구도 경쟁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역사상 최초의 슈퍼스타가 되었고, 그 영향으로 레코딩 산업에 불을 지폈다. 카루소가 없었다면 전축도 레코드도 없었을 것이고 아시아의 먼 나라에선 ‘오 솔레 미오’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카루소가 아니었더라도 그 누군가가 그 자리를 대신했겠지만 카루소 만큼의 강력한 촉매제 역할을 했을 거나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엔리코 카루소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창고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은 음악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고 카루소의 아버지는 아들이 기계공이 되길 바랐다. 이미 10살 무렵부터는 공장에 나가 견습 공으로 푼 돈이라도 벌어야 했을 만큼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런 환경에서도 카루소는 늘 낙천적이었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카루소의 재능을 처음으로 발견해낸 이는 브론제티 신부였는데 교회의 성가대에서 노래를 시킬 마음으로 카루소를 불러다 가르쳤다.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결혼식의 축가나 잡다한 연회장, 부둣가에서 배에 오르내리는 승객들을 위해 노래를 시키고 그 수입을 가로채 갔다고 한다. 이런 일화로 보아 스승으로서 카루소에게 영향을 준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카루소는 지역의 이름난 성악 코치였던 굴리엘모 베르지네(Gulielmo Vergine)를 만나게 된다. 한눈에 카루소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한 베르지네는 무일푼의 카루소에게 노예 계약의 조건을 내건다.

그는 수업료를 낼 수 없었던 카루소에게 돈을 받지 않고 4년간 레슨을 해주는 대신 앞으로 카루소가 노래하게 될 5년간의 수입 중 25%를 자기에게 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어리고 가난했던 카루소는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레슨을 받은 기간이나 계약 조건의 부당함으로 이 문제는 훗날 법정으로까지 가게 된다.

성악 레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카루소는 군 입대를 하게 되고 군대 안의 어느 장소에서나 항상 노래를 부르던 카루소는 오페라 마니아인 한 장교의 눈에 띄게 된다. 그의 재능을 알아챈 장교는 상부에 건의해 카루소의 동생을 대신 복무 시키는 조건으로 카루소가 조기 전역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21세가 되던 해 그의 스승 베르지네는 하루빨리 카루소를 무대에 세워 돈을 벌 계획으로 오페라 미뇽(Mignon)을 위한 오디션을 주선한다. 하지만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박자를 놓치는 실수를 하며 첫 오디션을 망쳐버린다. 하지만 바로 두 번째 오디션에서 오페라 ‘라미코 프란체스코’(L'Amico Francesco)로 데뷔하게 된다.

화려한 데뷔 무대는 아니었지만 이때 지휘자 빈첸초 롬바르디(Vincenzo lombardi)의 눈에 띄게 되고, 그의 도움으로 체계적인 오페라 코칭을 받으며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1897년 카루소는 푸치니의 오페라 라보엠(La boheme)의 ‘로돌포’ 역의 오디션을 위해 골도니 극장을 찾았다. 이때 피아노에는 ‘나비부인’(Madama Butterfly) ‘투란도트’(Turandot)로 유명한 위대한 작곡자 푸치니(Giacomo puccini)가 앉아 있었다.

그 이듬해인 1898년 드디어 이탈리아 최고의 무대인 라 스칼라 (La scalla) 극장에서 그것도 시즌 개막 오페라 '페도라(Fedora)'로 입성하게 된다. 원래 무대에 서기로 예정되어있던 테너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대타 가수'로서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카루소는 완벽하게 캐릭터를 소화하며 아리아 '금지된 사랑 (Amor ti vieta)'을 앙코르까지 받아내며 라 스칼라 데뷔 무대를 성공적으로 가졌다. 그 후 라스칼라에서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와 오페라 ’라보엠 (La bohem)‘을 공연했다. 성악가에게 특히 엄격했던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카루소에게 천사처럼 노래를 한다고 극찬을 했다. 미디어에서는 “천상의 소리와 관능적인 소리를 모두 다 갖고 있다”는 최고의 평을 쏟아냈다.

1877년 토마스 에디슨의 축음기가 발명된 이후 1902년 4월 11일은 음반 녹음 역사상 가장 기념할 만한 날이다. 카루소의 첫 레코드 취입을 위한 녹음 작업은 밀라노의 그랜드 호텔 카루소의 객실에서 이루어졌다. ‘세기의 테너’의 출연을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 그는 집음을 위한 둥근 나팔 앞에 섰다.

아직 마이크가 발명되기 전이기 때문에 녹음은 전기식이 아닌 어쿠스틱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는 팔리아치(Pagliacci)의 ‘의상을 입어라’(Vesti la giubba) 토스카(Tosca)의 ‘별은 빛나건만’(E luce van le stelle) 사랑의 묘약(L'ellisir d'amore)의 ‘남몰래 흘리는 눈물’(Una furtiva lagrima)등 오페라 아리아 10곡을 2시간 만에 녹음했다. 아직 대형 무대에서의 경험이 적었던 카루소였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히트를 치게 된다.

그중 오페라 팔리아치의 ‘의상을 입어라’는 음반 녹음 사상 최초로 100만 장 이상 팔려나갔으며, 최초의 골든 디스크로 기록된다. 이 음반 작업으로 그라모폰사는 당시로는 엄청난 액수인 1만 5000만 파운드의 수익을 올린다. 카루소는 고작 100파운드의 개런티를 받는 대신 전 세계에 이름과 목소리를 전파하며 슈퍼스타로 도약한다.

그 후 카루소는 빅터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100만 불이 넘는 음반 로열티를 거머쥐며 ‘레코딩의 제왕’으로 우뚝 서게 된다. 그리고 당시 항간에는 사진에 찍히면 영혼을 빼앗긴다는 미신처럼 녹음을 하면 목소리를 잃는다는 괴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하지만 카루소의 영향으로 제작자나 성악가들은 제2의 카루소를 꿈꾸며 녹음 경쟁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는 음반 사업의 활황과 녹음 기술 발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공연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오페라를 마침내 집에서도 들을 수 있게 되는 축음기 보급의 시대가 열린다.

카루소 음반의 대성공을 말해주는 통계로 1901년 7500대이던 축음기의 보급이 5년 뒤에는 무려 10배가 넘는 8만 6000대에 달했다고 한다. 세간에는 '축음기가 카루소를 만들었나, 아니면 카루소가 축음기를 만들었나'라는 말이 떠돌 정도였다.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음악 감독은 카루소의 음반을 듣자마자 그를 곧바로 뉴욕으로 부른다. 그렇게 카루소는 1903년 메트의 시즌 개막작인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Rigoletto)’의 만토바 공작 역으로 화려한 메트 데뷔식을 치른다. 30세의 나이에 몬테카를로 오페라하우스, 비엔나 국립 극장, 런던의 코벤트 가든 같은 전 세계 유수의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하게 된다.

카루소는 현대사에서 최초의 슈퍼스타로 여겨지고 있다. 공연을 다닐 때면 반주자, 비서, 회계사, 운전사. 의상 담당이 줄지어 따라다녔고, 뉴욕 시장이나 뉴욕 양키스의 야구 선수들보다도 더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당대 최고의 개런티를 받는 오페라 가수였던 그는 1918년 한 해 낸 세금이 무려 15만 4천 달러였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00년 전에 그것도 개인이 한 해 동안 낸 세금이 한화로 2억 원에 육박했으니 그가 거머쥐었던 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서른이 되던 해 뉴욕으로 건너오자마자 메트의 간판스타로 등극한 카루소는 18시즌 동안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모든 시즌 개막 공연을 장악했다. 하지만 과도한 스케줄로 인한 건강의 악화로 40대에 들어서면서 극심한 두통과 탈진, 졸도를 반복했다. 결국 1920년 오페라 ‘유대의 여인’(La Juive) 을 마지막으로 626회의 공연 기록을 남기며 메트를 떠나게 된다.

전 세계 최고의 성악가이자 슈퍼스타였던 그는 상류 사회에서 항상 귀족 같은 대우를 받았는데 카루소는 이를 몹시 불편해했다. 대신 동료나 친구들과 싸구려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즐겨 찾았고 레스토랑 종업원의 부탁에 흔쾌히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서 오페라공연 티켓을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닐 정도로 인품이 소박하고 넉넉했다. 때론 우연히 만나 대화를 나눈 사람에게 자신의 넥타이핀을 선물로 주기도 하고, 본인이 머무르던 호텔 앞의 거지에게 모피코트를 벗어주었다.

삶이 예술과 같았고, 삶부터 빛나는 테너였다. 훗날 카루소가 죽고 나서 수표를 보내며 도와주었던 120명의 명단이 발견되기도 했다.

1921년 새해가 되자 카루소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진다. 늑막염의 치료를 위해 폐와 가슴에서 액체를 빼내고 갈비뼈까지 제거하는 몇 차례의 수술 끝에 뉴욕을 떠나 요양을 위해 고향 나폴리로 돌아간다.

고향에 도착한 카루소는 병세가 호전되는 듯했으나, 한 의사의 실수로 세균에 감염되고 만다. 응급 수술을 위해 다음날 로마로 떠나기로 한 카루소는 베수비오 호텔로 거처를 옮겨 모르핀을 투여 받은 후 겨우 잠들게 된다. 하지만 다음날인 1921년 8월 2일 아침 결국 숨을 거둔다.

카루소는 고전(Classic)이다. 100년이 지난 이 테너 가수의 음반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전혀 진부하거나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전히 수많은 성악가가 카루소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지만 그는 최저점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오히려 더 새롭고 더 깊은 풍미를 뿜어내며 세월과 함께 연마를 더해 강한 빛을 발한다. 시대를 초월해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며 모든 성악가에게 모범이 되는 고전 중의 고전이다.

나폴리 민요 ‘오 솔레 미오’는 별도의 설명이 무색할 정도로 친숙한 곡이다. 이 가장 유명한 칸초네 나폴레타나(나폴리 민요)는 시인 죠반니 카푸로(Giovanni capurro)가 노랫말을 쓰고 에두아르도 디 카푸아(Eduardo di capua)가 곡을 붙였다.

흔히 '오! 나의 태양'으로 번역되곤 하는데 사실 맨 앞의 'O'는 감탄사 '오!'가 아닌 이탈리아어의 정관사 'il'과 같은 의미의 나폴리 방언이다.

이탈리아 표준어로는 'Il mio sole'이고 엄밀히 번역하자면 ‘오! 나의 태양’이 아닌 ‘나의 태양’인 셈이다.

노랫말 전체가 나폴리 방언으로 지어져 있어 이탈리아 사람들도 나폴리어 사전 없이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나폴리 민요라는 표현 대신 필자가 굳이 ‘칸초네 나폴레타나’라고 어렵게 부르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엄밀히 보자면 ‘오솔레미오’는 민요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노래의 후렴구 ‘나의 태양, 영원한 사랑. 그댈 만나 장미꽃 사랑이 내게로 온 것 같아요’의 노랫말을 살펴보면 나폴리지방의 특색이나 민중들의 생활상에 대한 묘사 대신 사랑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

사전적 정의로, 민요는 작자가 미상이어야 하며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워 정확한 악보 없이 구전되어 전해지는 노래를 뜻한다.

그런데 ‘오 솔레 미오’는 버젓이 작사 작곡자의 이름이 프린트되어 출판된 악보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민요로서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셈이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작곡 배경에 있다.

작곡가 디 카푸아는 1898년 우크라이나의 도시 오데사(Odessa)를 여행하게 되는데 우리가 상상했던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이 아닌 창문 틈새로 드리워진 아름다운 봄 햇살에 영감을 받아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디 카푸아는 이 곡을 ‘타볼라 로톤다’ 가요제에 출품하지만 2등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나폴리 출신의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음반을 취입 하며 비로소 전 세계에 널리 퍼지게 된다.

지휘자 안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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