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처럼 차갑고 피처럼 뜨겁다” 작가들의 영감이 된 책들

2024-04-26 14:22

add remove print link

“너무 사랑하는 친구의 유작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다”

책을 읽는 건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계를 만나는 일이다. 우리가 평생 경험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책은 그 한계를 넓히는 것을 넘어 한계의 너머를 보고 싶게 한다. 그렇다면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작가들은 평소 뭘 보고 듣고 읽을까.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 Michele Brusini-shutterstock.com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 사진 / Michele Brusini-shutterstock.com

(해당 내용은 채널예스가 제공하는 '당신의 책장' 코너를 바탕으로 합니다)

작가 문지혁

열린책들
열린책들

빵굽는 타자기 - 폴 오스터 저/김석희 역 ㅣ 열린책들

"무더웠던 2000년 여름, 진주의 훈련소에서 맞닥뜨린 이 몇 개의 문장이 결국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의사나 경찰관이 되는 것은 하나의 진로 결정이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선택되는 것이다. 글 쓰는 것 말고는 어떤 일도 자기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평생 동안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갈 각오를 해야 한다."

시공사
시공사

인 콜드 블러드 - 트루먼 카포티 저/박현주 역 ㅣ 시공사

"대학원 시절 커포티를 읽던 어떤 날이 아직도 생각난다. 책을 읽다가 이상하게 압도되는 기분이 들어서, 잠시 두꺼운 책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던 기억.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소재, 픽션과 논픽션 사이 어디쯤 있는 서술 방식, 커포티 특유의 문체[와 태도 등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이 책은 진짜다. 시체처럼 차갑고 피처럼 뜨겁다."

작가 박참새

미디어버스
미디어버스

태양과의 대화 -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저/이계성 역 ㅣ 미디어버스

"태국 태생의 영화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chatGPT에 수십 개의 프롬포트를 입력해 하나의 개성(혹은 성격)을 가진 '태양'을 탄생시킨다. 그는 그가 만들어낸 태양과 무한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궤도처럼 뻗어나가는 이 대화에서는 온갖 사물과 개체와 인간이 속수무책으로 등장한다. 어느 지점에 도달하면 그들이 마구잡이로 교차하면서 무엇이 진실인지 솎아내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여기에 있는 그 무엇도 진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가짜는 더더욱 아니다. 진실과 사실, 이 모호한 경계를 일종의 실험실로 바꿔낸 이 대화들에서 때때로 '진리'에 가까운 말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더없이 명백한 그 진리를."

작가 김선오

을유문화사
을유문화사

별의 시간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저/민승남 역 ㅣ 을유문화사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달걀과 닭'을 처음 알았을 때 그 책을 지나치게 좋아한 나머지 한 친구는 나에게 종교가 생긴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은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지만 그때 나는 리스펙토르의 책이 더 이상 번역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그의 책을 추천하고 다녔다. '별의 시간'은 리스펙토르의 마지막 소설이다. 너무 사랑하는 친구의 유작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다."

궁리출판
궁리출판

심해 - 클레르 누비앙 저/김옥진 역 ㅣ 궁리출판

"한때 러시아 어부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한 적이 있는데 그가 종종 찍어 올리는 심해 생물의 사진이 너무나 인상적이기 때문이다. 눈이 몸통만하다거나 입속에 또 다른 머리가 존재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상정해 왔던 생명체의 이미지라는 범주를 확연히 벗어나 있었다. 사회가 동물의 얼굴이라는 대상을 정말 인간중심주의적으로 그려 왔구나, 인간의 형상과 멀리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언제나 못생겼다고 여겨 왔구나...생각했다. 지난 연말, 친구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친구가 멋진 책이 있다며 가져와 보여줬다. 그는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이 책을 펼쳐본다고 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다양한 형태의 심해 생물들이 고화질로 인쇄돼 있었다. 외계라는 장소가 인간과 거리가 가장 먼 곳을 의미한다면 그곳이 바로 심해일 것 같다고, 심해의 어둠은 희한하게도 잠이라는 공간의 질감과 닮아 있어서 불면의 밤에 읽기 좋은 책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소설가 정보라 (번외)

SBS 제공
SBS 제공

그것이 알고 싶다 -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설명이 필요 없는 역사와 전통의 시사교양 시리즈. 다양한 의제를 다루고 필요할 경우 과학적인 실험으로 재연도 하기 때문에 의외로 SF를 쓸 때 도움이 된다."

소설가 전하영

미행
미행

점심 시집 - 프랭크 오하라 저/송혜리 역 ㅣ 미행

"'시차와 시대착오'에 실린 단편 소설 '경로 이탈'의 주인공 '최사해'는 부분적으로 프랭크 오하라를 떠올리며 쓴 인물이다. 프랭크 오하라는 뉴욕현대미술관의 안내 데스크에서 일할 때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해 몇 년 후 같은 곳에서 큐레이터로 재직하며 전시를 기획했던 시인이다. 그는 도시와 예술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들을 모아 '점심 시집'을 출간했다. 오 년 전부터 나는 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그럴 텐데 이따금 점심시간이 되면 프랭크 오하라를 생각하곤 한다."

민음사
민음사

처녀들, 자살하다 - 제프리 유제니디스 저/김사과·최민우 역 ㅣ 민음사

"책장을 정리하다가 '존 프리먼의 소설가를 읽는 방법'을 펼쳐보게 됐는데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첫 장편영화 'The Virgin Suicide'의 원작 소설을 쓴 제프리 유제니디스와의 인터뷰 글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가 쓴 책 중 하나가 4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는데... 나는 홀린 듯 그의 소설을 찾아 읽었고 다시 영화를 봤고 이 두 작품은 반드시 짝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설에 없는 것이 영화에 있고 영화에 없는 것이 소설에 있다."

수필가 유지혜

위즈덤하우스
위즈덤하우스

오로라 - 최진영 저 ㅣ 위즈덤하우스

"책에게 간택당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최진영 작가의 소설이 내겐 그랬다. '사랑보다 슬픈 것이 확실할 믿음'에 실망하고 있을 때 우연히 이 책을 만났다. 그의 소설에는 항상 얼굴들이 보인다. 혼잣말이 들린다. 그리고 웅크린 뒷모습이 하는 말들, 과장하지 않은 혼돈, 들키듯 쓰이는 심정, 최선을 다해 무너져도 이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회복하고 희망을 되찾는 인물들. 그리고 삶은 계속되리라는 암시. 그의 소설은 읽는다는 말보다 믿게 된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

신북스
신북스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 - 조르주 페렉 저/김용석 역 ㅣ 신북스

"창문을 내다보는 마음으로 읽는 책. 페렉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해 썼다. 경찰, 여행 가방, 우산, 배달부, 자동차, 성당, 그리고 사람들. 거리의 순간을 담담히 나열하는 작가를 상상하다 보면 세상이 다시 궁금해진다. 번역돼 출간된 페렉의 다른 작품들도 이와 같은 이유로 좋아한다. 전부 다른 종류의 창문이다."

home 한소원 기자 qllk338r@wikitre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