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통에 끼니 때우려고 먹었는데…지금은 고급 식당에 나온다는 '의외의 음식'
2025-04-0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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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서서 먹는 고급 메뉴로 변화
1950년대 전후, 쌀 배급이 끊긴 피난민과 서민들은 밀가루에 의존했다.

미국의 원조 물자로 수입된 분유와 밀가루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 식량 대체제로 사용됐고, 그중에서도 밀가루 반죽을 얇게 지져낸 밀전병은 특별한 조리법 없이도 간편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전쟁과 가난이 낳은 밀전병은 조리도구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팬 위에 밀가루 반죽을 얇게 펴 굽고, 그 위에 김치나 양념장을 얹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식재료의 제한으로 인해 다채로운 변형은 어려웠지만, 당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열량 보충 수단으로 기능했다.
밀전병은 이후 분식문화가 확산되면서 서민 간식 또는 급조한 한 끼로 활용됐지만, 한동안은 ‘가난한 시절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인식되며 외면받기도 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밀전병은 분식집의 저가 메뉴로 분류됐고, 기름기 없는 질감과 단순한 조리 방식 탓에 세련된 한식의 범주로는 포함되지 않았다.
◈ 밀전병의 재해석…‘한식 크레페’로 진화

최근 밀전병은 복고 열풍과 맞물려 재해석되며 새로운 위상을 얻고 있다. 브런치 전문점이나 한식 퓨전 레스토랑을 중심으로 다양한 재료와 소스를 활용한 메뉴가 등장하고 있으며, 특히 얇고 넓게 구운 전병 위에 리코타 치즈, 바질, 무화과, 수제 잼 등을 얹는 방식이 젊은 층의 호응을 얻고 있다.
반죽 재료도 다양화됐다. 기존의 정제 밀가루 대신 통밀이나 현미, 쑥, 메밀 등을 넣은 ‘건강형 밀전병’이 등장했고, 바삭한 식감을 내기 위해 반죽을 이중으로 구워내는 방식도 확산되고 있다. 디저트용으로는 크림치즈, 계피 가루, 견과류 등을 곁들이며 ‘한식 크레페’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최근에는 고급 한식 레스토랑에서도 밀전병이 등장하고 있다. 얇고 부드러운 전병 위에 전복, 관자, 훈제 연어 같은 해산물을 올리고, 들기름·버터·발사믹 글레이즈를 활용한 소스를 곁들이는 방식이다.
중식당에서는 베이징 덕을 밀전병과 채소와 함께 싸 먹는 방법도 별미로 통하고 있다.

단순한 반죽 한 장이 고단백 식재료와 만나며 본격적인 ‘요리’로 탈바꿈하고 있다. 일부 한식 파인 다이닝에서는 밀전병을 에피타이저로 활용하거나 한식 코스 요리의 중간 구성으로 포함하기도 한다.
◈ 지역 축제 음식으로 확장…세대를 잇는 음식 유산
지역 특산물과 접목한 사례도 눈에 띈다. 강릉 단오제에서는 강원도식 김치와 된장을 곁들인 밀전병이 축제 음식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충북 괴산 등 내륙 지역에서는 고추장, 장아찌류와 함께 전통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과거 생존을 위한 음식이었던 밀전병이 지금은 지방축제의 관광 콘텐츠로 소비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