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1000원도 안 하는데... 일반인은 구경도 못할 정도로 귀하고 비쌌던 과일
2025-05-29 16:28
add remove print link
알면 상당히 놀랄 수도 있는 이 과일의 비밀들

매일 아침 상큼한 오렌지 주스 한 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오렌지는 너무나 친숙한 과일이다. 이 과일에 4000년의 인류 역사와 놀라운 비밀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자연이 아닌 인간의 손에서 탄생한 이 특별한 과일은 색깔의 이름이 되고, 귀족들의 전유물이 됐으며, 때로는 종교적 상징물로까지 여겨져 왔다. 오렌지라는 작은 과일 속에 담긴 거대한 이야기를 풀어본다.
자연에 존재하지 않았던 과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오렌지는 사실 자연적으로 생겨난 과일이 아니다. 약 4000 년 전 중국에서 감귤과 포멜로(직경이 15~25cm 정도 되는 대형 감귤류)를 교배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인공 과일이다. 현대의 유전자 조작이나 품종 개량 기술이 없던 시절 고대 중국의 농업 기술자들은 자연의 두 과일을 교배해 완전히 새로운 맛과 특성을 가진 과일을 창조했다. 오렌지의 달콤함은 감귤에서, 크기와 과즙의 풍부함은 포멜로에서 물려받았다. 이렇게 탄생한 오렌지는 점차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 전해지며 세계 각지로 퍼져나갔다.
색깔보다 늦게 생긴 이름의 역설
흥미롭게도 'orange'라는 색깔 이름은 오렌지 과일보다 훨씬 늦게 생겨났다. 16세기 이전까지 영어권에서는 오렌지색을 표현할 독립적인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색을 '노란-빨강(yellow-red)' 또는 '붉은 노란색'이라고 불렀다.
오렌지라는 단어 자체는 산스크리트어 'naranga(나랑가)'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오렌지 나무'를 뜻한다. 이 단어가 아랍어를 거쳐 스페인어 'naranja', 프랑스어 'orange'를 거쳐 영어로 전해지면서 현재의 모습이 됐다. 결국 과일이 색깔의 이름을 만들어낸 셈이다.
원래는 주황색이 아니었던 오렌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주황색 오렌지는 사실 기후의 산물이다. 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오렌지는 완전히 익어도 껍질이 초록색을 띠는 경우가 많다. 오렌지의 주황색은 기온이 낮아질 때 클로로필이 파괴되면서 드러나는 카로티노이드 색소 때문이다. 그래서 상온보다 시원한 지역에서 수확한 오렌지가 더 선명한 주황색을 보인다.
사람들은 주황색 오렌지만을 잘 익은 오렌지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기에 초록색 오렌지는 에틸렌 가스 처리를 통해 인위적으로 색을 변화하기도 한다. 맛과 영양가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중세 유럽 귀족들의 황금 과일
11세기 무렵, 오렌지는 지중해 무역을 통해 유럽에 처음 전해졌다. 당시 오렌지는 말 그대로 '황금'과 같은 가치를 지닌 과일이었다. 추운 유럽 기후에서는 자연 재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온실에서만 재배할 수 있었고 일반인들은 구경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하고 비싼 과일이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에는 오렌지만을 위한 별도의 온실인 '오랑주리(Orangerie)'가 건설됐을 정도다. 이곳에서 수백 그루의 오렌지 나무를 키웠는데, 겨울이 되면 나무를 통째로 실내로 옮겨야 했다. 오렌지 하나를 키우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을 생각하면, 당시 오렌지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 대형마트 등에서 오렌지가 한 개에 1000원도 안 되는 가격에 팔린다는 점을 떠올리면 놀랄 만한 일이다.
씨 없는 오렌지의 놀라운 비밀
마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네이블 오렌지(배꼽처럼 생긴 부분이 있는 오렌지)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다. 이 오렌지는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씨가 없고 스스로 번식할 수도 없다. 그래서 모든 네이블 오렌지는 접붙이기로만 번식한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전 세계 대부분의 네이블 오렌지가 1820년 브라질의 한 그루 나무에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네이블 오렌지의 '배꼽(navel)'으로 불리는 부분은 실제로는 두 번째 작은 오렌지가 덧붙은 것이다. 이 미니 오렌지는 껍질 안에서 자라지만, 대부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작고 기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쌍둥이 중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서 자라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종교와 예술 속의 오렌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오렌지는 단순한 과일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기독교 예술에서 오렌지는 순결, 천국, 부역을 상징했다. 특히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묘사한 그림에 자주 등장했는데, 카라바조와 보티첼리 같은 거장들의 작품에서 오렌지를 정물로 그린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렌지의 흰 꽃은 순결을, 황금빛 과일은 신성함을, 상록수인 나무는 영원함을 의미했다. 결혼식에서 신부가 오렌지 꽃을 머리에 꽂는 전통도 여기서 비롯됐다.
버릴 것 없는 완벽한 과일, 껍질의 숨은 가치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리는 오렌지 껍질에는 과육보다 훨씬 많은 영양소가 들어 있다. 껍질에는 과육보다 4배 많은 비타민 C가 함유돼 있으며, 섬유질과 플라보노이드 같은 항산화 물질도 풍부하다.
오렌지 껍질은 마멀레이드의 주재료가 되기도 하고, 갈아서 제스트(zest)로 만들어 제과나 요리에 향을 더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오렌지 껍질로 우린 차는 소화에 도움을 주고 스트레스 완화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농약 잔류물 때문에 껍질을 사용할 때는 깨끗하게 세척하거나 유기농 오렌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신선하지 않은 '신선한' 오렌지 주스
마트에서 판매되는 '신선한 100% 오렌지 주스'에도 놀라운 비밀이 있다. 이 주스들은 실제로는 산소를 완전히 제거한 상태로 6개월에서 1년까지 보관된 제품일 수 있다. 장기간 보관 과정에서 오렌지 고유의 향이 사라지기 때문에, 화학적으로 제조한 향료를 다시 첨가해 '신선한' 맛을 재현한다.
이런 기술 덕분에 우리는 계절에 관계없이 언제든 오렌지 주스를 마실 수 있지만 진정한 '신선함'과는 거리가 있는 셈이다.
지역별로 다른 오렌지의 운명
미국에서 생산되는 오렌지는 재배 지역에 따라 완전히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 플로리다산 오렌지는 당도는 높지만 모양이 울퉁불퉁하고 껍질이 얇아서 주로 주스용으로 쓰인다. 반면 캘리포니아산 오렌지는 껍질이 두껍고 매끈해서 마트에서 생과로 판매된다.
이는 각 지역의 기후와 토양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플로리다의 습한 기후는 당분 함량을 높이지만 외관을 거칠게 만들고, 캘리포니아의 건조한 기후는 껍질을 두껍고 매끄럽게 만든다.
오렌지의 놀라운 영양학적 가치
오렌지는 비타민 C의 대표적인 공급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다. 중간 크기의 오렌지 하나에는 약 237mg의 칼륨이 들어 있는데, 이는 바나나(약 422mg)에는 못 미치지만 오렌지 두 개면 쉽게 넘을 수 있는 수치다. 게다가 오렌지에는 바나나에 없는 풍부한 비타민 C가 들어있어 운동 후 섭취하면 근육 회복과 면역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
오렌지에 함유된 헤스페리딘이라는 플라보노이드는 혈압을 낮추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개선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엽산이 풍부해 임산부에게 특히 좋으며, 섬유질은 소화 건강을 돕고 포만감을 오래 유지시켜준다.
비타민 C 함량은 하루 권장량의 90% 이상을 충족할 정도로 풍부하다. 비타민 C는 콜라겐 합성을 돕고, 철분 흡수를 촉진하며, 강력한 항산화 작용을 통해 세포 손상을 방지한다. 특히 겨울철 감기 예방에 효과적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