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만에 동시에 꽃 피우고 함께 죽어버리는 '한국서 가장 신비한 식물'
2025-08-23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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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보다 단단한데… 알고 보니 나무가 아니라 ‘풀’이었던 뜻밖의 식물

수십 년간 조용히 자라던 대나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일제히 꽃을 피운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 같은 종의 대나무들이 동시에 꽃을 피우고, 그 후 모두 죽어버린다. 식물계에서 가장 신비로운 현상 중 하나로 꼽히는 대나무 꽃의 비밀에 대해 알아봤다.
이정모 국립과천과학관 관장은 22일 유튜브 채널 '보다'에 올라온 영상에서 대나무의 독특한 생태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대나무는 수십 년에서 100년에 걸쳐 딱 한 번만 꽃을 피운다. 종류에 따라 개화 주기가 다른데, 멕시코 대나무는 30년마다, 필리핀 대나무는 60년, 일본 대나무는 120년 주기로 꽃을 피운다.
이정모 관장은 "한 지역의 모든 대나무가 동시에 꽃을 피우고 집단적으로 죽는 현상이 일어난다"며 "같은 종의 대나무는 전 세계에 퍼져 있어도 마치 약속한 것처럼 같은 시기에 꽃이 핀다"고 설명했다.
대나무는 '모노카르픽 식물'로 분류된다. 이는 일생에 단 한 번 번식하는 식물이라는 뜻이다. 꽃을 피우면 모두 죽는 특징을 가진다. 평상시에는 뿌리줄기가 뻗어나가며 복제 클론을 만드는 무성생식으로 번식한다. 우리가 음식에서 먹는 죽순이 바로 이 무성생식의 결과물이다.
대나무가 이런 극단적인 번식 전략을 택한 이유는 '포식자 포화 전략'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꺼번에 어마어마한 양의 씨앗이 생기면 포식자가 아무리 먹어도 일부는 남을 수밖에 없다. 이정모 관장은 "1%의 씨앗만 남아도 번식에는 다시 성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나무 씨앗을 먹고 쥐와 다람쥐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씨앗을 다 먹은 후에는 농작물을 해치게 된다. 실제로 인도 동북지역에서는 멜로카나 대나무가 집단으로 꽃을 피운 후 쥐 떼가 창궐해 식량 위기를 불러온 적이 있다. 인도에서는 이를 '죽음의 해'라고 한다.
대나무에 의존하는 판다 같은 동물들에게도 치명적이다. 먹이가 부족해져 개체수가 급감하고, 죽은 대나무로 인해 산불 위험도 높아진다.
흥미롭게도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이정모 관장은 "대나무는 목본 식물이 아니라 초본 식물로, 벼과 식물에 속하는 다년생 풀"이라고 설명했다. 나무는 계속 굵어지고 높아지지만 대나무는 줄기가 다 자라면 성장이 정지한다. 또한 나무와 달리 줄기에서 가지가 갈라지지 않고 마디마디 사이에서 잎이 난다.
"나이테가 없는 건 나무가 아니다"라고 간단히 구분할 수 있다고 이정모 관장은 덧붙였다. 바나나, 사탕수수, 야자수 등도 마찬가지로 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풀에 속한다.
대나무는 3000만 년 전 신생대 올리고세에 중국, 인도, 미얀마 지역에서 처음 나타났다. 현재는 전 세계로 퍼져 있지만 북미에는 없다. 빙하기였던 플라이스토세(약 260만 년 전부터 1만 1700년 전까지의 시기. 지구 기온이 주기적으로 크게 떨어져 북반구의 상당 부분이 거대한 빙하로 덮였다)에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강도 면에서 대나무는 '강철보다 단단하다'는 표현이 완전한 과장은 아니다. 인장 강도가 건축용 강철보다 높은 경우가 있어 건축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건축용 연강의 인장 강도가 350~400MPa(메가파스칼)인 반면 대나무는 370~500MPa에 달한다. 게다가 가볍고 가공하기 쉬우며 지진이나 강풍에도 잘 견딘다.
최근에는 우주 개발에도 활용되고 있다.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가 교토대학과 함께 대나무에서 추출한 셀룰로스 나노섬유(CNF)로 위성을 만드는 목재 위성 프로젝트 ‘리그노샛(LignoSat)'을 진행했다. 금속보다 가벼우면서도 대기권 진입 시 완전히 연소돼 우주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환경 친화적 소재로서 대나무의 가치도 재평가받고 있다. 대나무 섬유나 셀룰로스, 리그닌을 활용한 친환경 대체 소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도시락, 자동차 내장재, 전자기기 케이스, 가구 등 다양한 분야에 활용되고 있다. 3D 프린터 소재로도 개발되고 있어 플라스틱을 대체할 친환경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대나무를 주식으로 하는 동물로는 판다가 대표적이다. 판다는 하루에 12~38kg의 대나무 잎을 먹는다. 대나무엔 영양분이 별로 없다. 더욱이 소화도 안 된다. 원래 잡식성이었던 판다가 다른 곰들에게 쫓겨 높은 산으로 올라가면서 대나무만 먹게 됐다고 추정된다.
이정모 관장은 "판다는 손목뼈의 일부가 튀어나와 가짜 엄지손가락을 갖고 있고, 턱근육이 발달해 대나무를 잡고 벗기기에 적합하게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마다가스카르에 사는 대나무 여우원숭이의 경우 더욱 극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큰대나무여우원숭이와 작은대나무여우원숭이 모두 죽순을 주식으로 삼았는데, 사람이 들어와 서식지가 줄어들자 작은대나무여우원숭이는 식성을 바꿔 다른 열매와 식물을 먹기 시작했다. 반면 큰대나무여우원숭이는 죽순만 고집하다가 멸종 위기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