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 주변에 (한미)동맹파가 너무 많다” 발언 파장
2025-09-2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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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파 vs 자주파 논란 21년 만에 재현되나

닳고 닳은 말 같은 ‘동맹파’와 ‘자주파’라는 말이 21년 만에 전면 등장했다.
여권 원로인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한 외교 노선을 주장하는 '동맹파'를 "대통령이 앞으로 나갈 수 없도록 붙드는 세력"이라 비판하며 정부 외교·안보 라인의 인적 개혁을 주장했다.
정 전 장관은 26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세미나에 자문위원으로 참석해 "이른바 동맹파들이 너무 많다"며 이같이 말했다.
정 전 장관은 "미국이 싫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통령 주변에 있다. 이렇게 되면 '문재인 정부 시즌2'가 된다"며 세미나에 참석한 민주당 지도부 등을 향해 "대통령 측근 개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통일부를 이끌었던 정 전 장관은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에서는 대통령 주변에 소위 동맹 자주파가 있으면 앞으로 나가고 동맹파가 지근 거리에 있으면 아무것도 못 했다. 지금 그렇게 돼가고 있다"고 생각을 밝혔다.
정 전 장관의 이날 발언은 외교관 출신으로 평소 한미 동맹을 강조해 온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을 겨냥한 것이란 해석을 낳았다. 정 전 장관은 남북 관계를 중심으로 외교·안보 노선을 설정하고자 하는 '자주파'의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자주파에는 이종석 국정원장,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 더불어민주당 박지원 의원 등이 꼽힌다.
그는 이재명 대통령이 최근 페이스북에 "'똥별'이라는 과한 표현까지 쓰면서 국방비를 이렇게 많이 쓰는 나라에서 외국 군대 없으면 국방을 못 한다는 식의 인식을 질타한 노무현 대통령이 떠오른다"고 적은 것을 언급하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 이 대통령 행보와 관련해 군대에서 저항이 있다는 방증"이라고 해석했다.
이어 민간 출신인 안규백 국방부 장관을 겨냥한 듯 "문민 장관을 보내 군인들을 장악하라 했더니 끌려다니면 뭘 하느냐. 이렇게 되면 이 대통령은 바보가 된다"며 "국방부 장관을 격려하든 잡도리하든 군인들을 좀 통제하게 해달라"고 했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의 비핵화를 끌어내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북핵 동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이 대통령이 지난 23일(현지시간)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제시한 '엔드(END) 이니셔티브'를 비판하기도 했다. END 이니셔티브는 교류(Exchange)·관계 정상화(Normalization)·비핵화(Denuclearization)를 의미하는 포괄적 한반도 평화 비전이다.
그는 "참모들이 (북핵) 동결의 조건이라든가 방법론에 대해 얘기할 수 있도록 지혜를 만들어 줘야 하는데 그건 안 하고 무슨 'END'라는 멋있는 글자를 만들었다"며 "비핵화 얘기를 왜 넣느냐. 대통령님 끝장낼 일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세미나에는 민주당 정청래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 의장인 조정식 의원 등 민주당 의원들 외에도 박윤주 외교부 1차관, 임성남 전 외교부 1차관 등도 참석했다.
정 대표는 "외교, 안보, 통일 모두 치밀한 전략이 필요할 때"라며 "이 대통령이 지금 하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실용주의에 입각한 국익 중심 외교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하나의 길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최근 조지아주 사태, 전시작전통제권 이양 논의, 북한의 비핵화 문제 등을 열거하며 "우리 앞에는 경제부터 안보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하나하나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남북 관계가 부침을 겪지 않도록 법제화를 통해 국회가 뒷받침하는 것도 본격적으로 논의할 생각"이라며 "평화보다 앞서는 남북 관계는 없다"고 강조했다.
자주파와 동맹파를 둘러싼 논란은 21년 전인 한국을 발칵 뒤집은 바 있다.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 당시 북미 3과장이었던 조현동 전 주미대사가 과원들과의 술자리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이종석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장(현 국정원장), 청와대 386인사들의 대미외교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외교부 내부직원이 청와대에 보낸 투서가 발단이었다. 투서엔 "조 과장이 '청와대 젊은 보좌진은 탈레반 수준이며 노 대통령이 이들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등의 말을 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당시는 미군 용산기지 이전 문제 등을 놓고 자주파로 대변되는 청와대와 NSC에서 "외교부의 미국 추종 외교가 너무 심하다"는 불만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단순 '술자리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던 일은 결국 윤영관 당시 외교부 장관의 경질러 이어지는 대형 사태로 번졌다. 조현동 전 주미대사는 결국 보직해임된 뒤 국방대학원에서 교육을 받다 인도 대사관으로 발령나 3년을 근무했다. 위성락 실장은 조 과장 직속 상관으로서 지휘 책임을 지고 6개월 만에 국장직에서 물러나 이종석 원장 밑으로 파견 조치됐다. 이 사건은 외교부 내 동맹파와 청와대 자주파 간의 노선 갈등이 표면화된 대표적 사례로 기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