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살린 나무라더니...900살 도심 나무가 천연기념물 된 이유
2025-11-26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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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홍수 일화 품은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지정 예고
청주 중앙공원에 있는 은행나무 ‘압각수’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다.

국가유산청은 자연유산위원회가 최근 열린 동식물유산분과 회의에서 ‘청주 압각수’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 안건을 가결했다고 26일 밝혔다. 국가유산청은 내부 검토를 거쳐 지정 계획을 관보로 고시할 예정이다.
청주 압각수는 충북 청주시 상당구 중앙공원에 있는 은행나무다. 수령은 약 9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23.5m다. 지표면에서 약 1.2m 높이에서 잰 둘레는 8.5m에 이른다.
이 나무는 역사적 기록과 연계된 점이 특징이다. 조선 전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말 학자이자 충신으로 알려진 목은 이색(1328∼1396)과 관련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1390년 무신 윤이와 이초 등이 이성계 일파를 무고한 사건으로 여러 학자들이 청주 감옥에 갇혔는데 큰 홍수가 나자 이들이 은행나무에 올라 화를 피했다는 내용이다. 이후 왕이 하늘이 죄가 없음을 증명하는 징표로 받아들여 이들을 석방했다는 전승이 이어지며 나무가 ‘압각수’로 불리게 됐다.

국가유산청은 문헌과 지도에서 나무의 존재가 확인된다는 점도 지정 근거로 들었다. ‘택리지’ 등 여러 자료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고 ‘청주읍성도’ 같은 옛 지도에도 은행나무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정 조사에 참여한 전문가는 역사적 근거와 상징성이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은행나무의 여러 별칭 가운데 ‘압각수’라는 이름이 특정 나무에만 붙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점도 의미가 있다는 설명이다.
은행나무 천연기념물은 서울 문묘 은행나무와 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강원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등 전국에 25그루가 지정돼 있다. 청주 압각수가 추가 지정되면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는 26그루로 늘어난다.

◈ 왜 은행나무가 이렇게 많을까…도심을 점령한 ‘장수 나무’
은행나무는 국내에서 유독 오래된 개체가 많이 남아 있는 수종으로 꼽힌다. 수백 년에서 천 년 가까이 버티는 강한 생명력 덕분에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세대를 넘어 살아남는 경우가 흔하다.
큰 병충해에 잘 무너지지 않고 추위와 가뭄에도 강해 마을의 상징목이나 공공 공간의 보호수로 유지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역사적으로도 은행나무는 사람이 모이는 핵심 공간에 집중적으로 심어졌다. 사찰에서는 장수와 번영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 경내에 많이 식재했고 조선 시대 향교 서원 관아 같은 유교적 공간에서도 기념수와 경관수로 활용됐다.
이렇게 지역의 중심 장소에 심어진 은행나무는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마을의 표지와 기억을 담는 존재가 됐고 이후 문화재나 보호수 지정으로 이어지는 기반이 됐다.

실용적 가치도 보존에 영향을 줬다. 은행 열매는 식용과 약용으로 쓰이며 예전에는 흉년 대비 식재료로도 취급돼 공동체가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고 관리하는 동기가 됐다.
여기에 커다란 수형과 위엄 있는 모습 때문에 당산나무나 마을 신목 역할을 맡는 사례가 많았고 제사나 마을 행사가 연결되면서 보호 의식은 더 강해졌다.
근대 이후에는 공해에 강하고 관리가 비교적 쉬운 특성 때문에 가로수로도 널리 퍼졌다. 암수딴그루인 특성을 고려해 열매 민원이 적은 수나무 위주로 심은 영향도 있어 도심 곳곳에 은행나무가 높은 비중으로 자리 잡게 됐다.
결과적으로 생물학적 강인함과 역사적 식재 관행 사회적 활용도가 겹치면서 오늘날까지 은행나무가 유독 많이 남아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