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깎은 뒤 소금물에 담가보세요... 왜 진작 몰랐을까 싶게 신기하네요
2025-12-3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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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은 사과가 갈색으로 변하는 이유와 소금물의 과학
아침 식탁에 올린 사과 한 조각. 집안일을 하고 돌아오니 하얗던 과육이 어느새 갈색으로 변해 있다. 얼핏 단순하게 보이는 이 현상 뒤에는 복잡한 생화학 반응이 숨어 있다. 사과뿐 아니라 배, 바나나, 복숭아, 감자, 우엉까지…. 우리가 먹는 많은 과일과 채소에서 나타나는 갈변 현상의 비밀과 함께 갈변 현상을 막는 법에 대해 알아본다. 
갈변의 주범은 폴리페놀 산화효소다. 채소와 과일의 갈변을 일으키는 원인 물질인 이 효소는 평소엔 식물 세포 속에 조용히 존재한다. 그러나 칼로 과일을 자르거나 껍질을 벗기면 상황이 달라진다. 식물체에 상처가 나면 폴리페놀 옥시데이즈 효소와 공기 중의 산소가 만나 반응하면서 폴리페놀 성분들을 퀴논과 같은 물질로 산화한다.
폴리페놀은 원래 식물이 자외선이나 병충해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물질이다. 녹차의 카테킨, 포도의 레스베라트롤, 사과와 양파의 퀘르세틴이 모두 폴리페놀에 속한다. 이 물질들은 항산화 작용으로 우리 몸에 이롭지만, 과일이 상처를 입으면 다른 작용을 시작한다.
퀴논이나 그 퀴논 유도체들은 활성이 대단히 크기 때문에 비효소적으로 계속 산화하고 결국 멜라닌 색소와 같은 갈색 또는 검은색의 효소를 형성하게 된다. 이 멜라닌 색소가 바로 우리가 보는 갈색의 정체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갈변 반응이 식물의 방어 기제라는 사실이다. 상처 부위를 빠르게 갈변시켜 병원균의 침입을 막고 수분 손실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금물은 어떻게 이 반응을 막는가. 폴리페놀 산화효소는 구리나 철에 의해 활성화되고 염소이온에 의해 억제된다. 소금의 화학명은 염화나트륨이고, 물에 녹으면 나트륨 이온과 염소 이온으로 분리된다. 묽은 소금물의 염소이온 성분이 갈변을 억제하는 것이다. 염소 이온이 효소의 활성 부위에 결합하면 효소가 폴리페놀을 산화시키는 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설탕물도 효과가 있지만 원리는 다르다. 설탕물은 과일 표면을 코팅해 산소와의 접촉을 막아준다. 갈변 반응에는 효소, 폴리페놀, 산소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모두 필요하다. 이 중 하나라도 제거하거나 차단하면 갈변을 막을 수 있다. 설탕물은 과일 표면에 얇은 막을 형성해 공기 중의 산소가 과육에 닿지 못하게 하는 물리적 장벽 역할을 한다.
레몬즙이나 식초도 효과적이다. 폴리페놀 산화효소는 일반적으로 최적의 pH가 5.7에서 6.8이며, 과일의 경우는 pH가 5에서 6이다. 레몬즙이나 식초를 뿌리면 pH가 낮아져 산성이 강해지고, 효소의 활성이 크게 떨어진다. 또한 레몬에 풍부한 비타민C는 강력한 항산화제로 폴리페놀보다 먼저 산화되면서 갈변을 지연한다.
귤은 비타민C 함량이 많기 때문에 거의 갈변이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 사과와 배는 비타민C 함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폴리페놀이 풍부해 갈변이 빠르게 진행된다. 감도 갈변을 거의 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효소가 감의 떫은맛 성분인 탄닌과 결합해 그 활성을 잃기 때문이다.
효소는 열에 약하기에 열처리를 하면 갈변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감자를 삶거나 사과를 익히면 갈변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다. 단백질로 이뤄진 효소는 60도 이상의 열을 받으면 구조가 변성돼 기능을 잃는다. 냉장 보관도 효과가 있다. 효소는 저온에서 활성이 크게 떨어지므로 깎은 과일을 냉장고에 넣으면 갈변 속도가 느려진다.
사과 배 등의 갈변은 구리나 철로 만든 칼의 사용을 피해야 한다. 구리와 철 이온은 폴리페놀 산화효소를 활성화해 갈변을 더욱 촉진하기 때문이다. 스테인리스 칼이나 세라믹 칼을 사용하면 갈변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다.
갈변을 방지하려면 효소, 기질인 폴리페놀, 산소 중 하나를 제거하면 된다. 소금물은 염소이온으로 효소를 억제하고, 설탕물은 산소를 차단하며, 식초는 pH를 낮춰 효소 활성을 떨어뜨리고, 냉장은 효소의 활동 속도를 늦추고, 열처리는 효소를 파괴한다. 같은 결과지만 각각 다른 메커니즘으로 갈변을 막는 것이다.
가정에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물 1리터에 소금 1작은술을 녹인 묽은 소금물에 깎은 과일을 5분 정도 담갔다가 꺼내는 것이다. 너무 진한 소금물은 과일의 맛을 해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설탕물을 사용할 경우에도 같은 비율로 희석해 사용하면 된다.
랩으로 과일을 밀봉하해도 효과가 있다. 산소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면 갈변 속도가 느려진다. 다만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랩 안에도 공기가 남아 있고, 과일 조직 속에도 산소가 용해돼 있기 때문이다.
갈변된 과일을 먹어도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 갈변은 단순히 화학 반응의 결과일 뿐 부패나 변질과는 다르다. 다만 맛과 식감이 떨어지고 비타민C가 파괴되는 단점이 있다. 미관상으로도 좋지 않아 식욕을 떨어뜨릴 수 있다.
갈변이 일어나는 음식은 사과 이외에도 바나나, 배, 복숭아, 연근, 우엉, 감자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폴리페놀과 폴리페놀 산화효소를 함유하고 있으며, 상처를 입으면 같은 메커니즘으로 갈변이 진행된다.
주방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현상 하나에도 효소, 산화, pH, 이온 같은 화학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소금물 한 그릇이 과일의 갈변을 막는 과정은 수천 년간 축적된 경험적 지혜가 현대 과학으로 증명된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