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 해지하러 섬 가라고?"… 엉망진창 E-8 계절근로자 제도 혼선~정부는 수년째 '나 몰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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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간 핑퐁 게임에 은행·보험 기준 제각각… 지침 없는 행정에 지자체·농가만 '속앓이'

[위키트리 광주전남취재본부 노해섭 기자]"외국인 일손이 없으면 당장 내일 밭농사를 접어야 할 판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합법적으로 데려와서 쓰는 과정이 마치 지뢰밭을 걷는 것 같습니다."

극심한 인력난에 허덕이는 대한민국 농어촌을 구원할 '동아줄'로 여겨졌던 E-8 외국인 계절근로자 제도가 끝없는 파음에 휩싸이고 있다.
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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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실정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탁상행정과 각 부처의 책임 떠넘기기가 맞물리면서, 농가와 지자체는 물론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입국한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법무부, 고용노동부, 금융당국 등 관련 기관들이 통합된 매뉴얼 하나 내놓지 못한 채 수년째 수수방관하는 사이, 대한민국 농업의 최전선은 멍들어 가고 있다.

■ 산재보험 가입은 '복불복'?… 엇갈리는 규정에 농심은 타들어간다

가장 심각한 불만이 터져 나오는 지점은 바로 노동자들의 안전과 직결된 산재보험 문제다. 외국인 계절근로자가 입국하여 현장에 투입되기 전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행정 절차지만, 정작 실무를 담당하는 기관마다 안내하는 내용이 천차만별이다. 외국인등록번호가 발급되기 전이라도 산재보험 가입이 가능한지를 두고 근로복지공단 지사마다 해석이 엇갈리는 황당한 촌극이 빚어지고 있다.

여기에 더해 농업 분야 특유의 '농작업안전재해보험'과 일반 산재보험 간의 중복 가입 의무나 적용 범위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마저 부재한 실정이다. 농장주들은 비싼 보험료를 꼬박꼬박 납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작업장 내에서 안전사고가 발생했을 때 정확히 어떤 절차를 거쳐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확답을 듣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제도를 설계한 정부조차 명쾌한 유권해석을 내리지 않다 보니, 불의의 사고에 대한 책임 소재는 온전히 농가의 몫으로 남겨진 상태다.

■ 창구마다 다른 은행 업무… "금융 후진국이 따로 없네"

금융권의 주먹구구식 업무 처리 방식도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타국에서 피땀 흘려 번 돈을 본국으로 송금하거나 생활비로 사용하기 위해 필수적인 금융 서비스가, 단지 어느 은행의 '어느 지점'을 방문하느냐에 따라 승인 여부가 뒤바뀌고 있다. 입국 초기, 아직 신원 증빙 서류가 완벽하게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체크카드 발급, 모바일 뱅킹 신청, 해외 송금 한도 설정 등 핵심 업무를 처리할 때 창구 직원의 개인적인 판단이나 지점별 임의 규정이 법보다 우선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반복된다.

심지어 근로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 급여 통장을 해지하려는 외국인 근로자에게 "최초 계좌를 개설했던 바로 그 지점에 방문해야만 해지가 가능하다"는 억지스러운 규정을 들이미는 사례마저 속출하고 있다.

전라남도의 한 도서 지역에서는 통장 하나를 없애기 위해 왕복 수만 원의 배삯을 지불하고 반나절을 허비해 섬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코미디 같은 실태가 고발되기도 했다. "이것이 진정 IT 강국이자 디지털 금융을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민낯이냐"는 자조 섞인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 시한폭탄 퇴직금 분쟁… 법적 가이드라인은 '깜깜이'

미래에 다가올 더 큰 재앙은 바로 '퇴직금'을 둘러싼 노사 간의 법적 분쟁 가능성이다. E-8 비자의 특성상 성실하게 근무한 근로자는 다음 해에도 같은 농가로 재입국하여 일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진다. 문제는 이렇게 몇 년에 걸쳐 반복적으로 단기 계약을 맺고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계속 근로 연수'를 인정하여 퇴직금을 지급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문화된 법적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고용노동부는 이러한 특수한 고용 형태에 대한 명확한 행정 해석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이로 인해 농가들은 훗날 수백만 원에 달하는 퇴직금 소송 폭탄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외국인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제도의 빈틈을 노린 브로커들이 개입해 악의적인 기획 소송을 부추길 우려마저 제기되고 있지만, 중앙부처는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 현장에만 책임 떠넘기는 중앙정부… "통합 컨트롤타워 절실"

이러한 모든 모순과 행정 공백의 피해는 고스란히 기초지방자치단체의 실무 담당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비자 발급부터 입국, 주거 시설 점검, 노사 갈등 중재, 출국 관리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계절근로자 제도의 A부터 Z까지 모든 총대를 지자체가 메고 있지만, 정작 이들의 업무를 뒷받침해 줄 중앙정부 차원의 '표준 운영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는다.

담당 부처가 법무부, 고용부, 농식품부 등으로 갈가리 찢겨 있다 보니, 문제가 터질 때마다 부처 간 칸막이 뒤에 숨어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핑퐁 게임만 되풀이하고 있다.

농촌 현장에서는 "제도를 급조해 툭 던져놓고 뒷수습은 지자체와 농민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무책임한 행정이 한계에 다다랐다"고 울분을 토한다.

E-8 제도가 대한민국 농업을 살리는 진정한 구원투수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부처 간의 이기주의를 타파하고 현장의 혼란을 일거에 정리할 수 있는 '통합 컨트롤타워'의 신설과 전국 공통 가이드라인 마련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