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기억해야 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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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날 서해서 벌어진 남북 해전, 6명의 전사자를 낸 충돌
참수리 357호정의 마지막 전투, 지휘관 전사 후에도 이어진 교전
온 나라가 월드컵에 열광하던 어느 날, 국민을 지키기 위해 용감히 나서 순직한 군인들이 있었다.
2002년 6월 29일, 한국 축구대표팀이 터키와 월드컵 3·4위전을 치르던 그날 서해 북방한계선 인근에서는 남북 해군 간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국가적 축제의 순간과 군사 충돌이 동시에 발생한 이 사건은 이후 ‘제2 연평해전’으로 불리며 한국 해군사에서 중요한 전투로 기록됐다.
당시 교전은 오전 시간대 서해 연평도 인근 해역에서 시작됐다. 북한 경비정 2척이 NLL을 넘어 남하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긴장 국면으로 전환됐다. 우리 해군은 즉각 경고 사격으로 대응했지만, 북한 함정이 조준 사격으로 맞대응하면서 약 20여 분간 본격적인 해상 교전이 이어졌다.

군 당국에 따르면 북한 경비정 ‘등산곶 684호’와 388호는 오전 9시 46분쯤 남하를 시작해 10시 무렵 NLL을 침범했다. 이에 우리 해군은 참수리급 고속정 3개 편대와 포항급 초계함 2척을 급파해 대응에 나섰다. 각 편대는 북한 경비정 1척씩을 맡아 대응했고, 후방 전력은 민간 어선 보호와 철수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교전의 중심이 된 것은 참수리 357호정이었다. 해당 함정은 232편대 소속으로, 358정과 함께 북한 684호를 추적했다. 그러나 기동 과정에서 충돌을 피하기 위한 회피 기동이 이어지며 357정이 북한 함정의 측면에 노출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때 북한 경비정은 경고 사격 없이 85mm 포를 먼저 발사하며 본격적인 교전이 시작됐다.
우리 측은 즉각 대응 사격에 나섰고, 해상에 배치된 고속정과 초계함이 동시에 교전에 참여했다. 그러나 교전 시작 약 4분 만에 북한의 37mm 포탄이 357호정 함교를 직접 타격하면서 전투 양상은 급격히 악화됐다. 이 과정에서 참수리 357호정 정장이었던 윤영하 소령(당시 대위)이 전사했다.

지휘관이 전사한 직후에도 전투는 중단되지 않았다. 부장 이희완 중위(현 대령)가 지휘권을 이어받아 교전을 계속 지휘했다. 이후 함정 내부는 지속적인 피격으로 엔진과 전력 계통이 손상됐고, 조타실과 주요 전투 구역이 잇따라 피해를 입었다.
이 과정에서 조타장 한상국 상사, 발칸포 사수 황도현 중사, 기관총 사수 서후원 중사 등 다수 장병이 전사했다. 포탑 내부 화재와 유독가스, 직격탄 피해 등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함정 전투 능력은 급격히 저하됐다. 의무병 박동혁 상병은 부상 상황에서도 승조원 구호와 기관총 사격을 이어갔으나 이후 중상을 입고 후송된 뒤 사망했다.
우리 측 피해는 전사자 6명, 부상자 19명으로 집계됐다. 반면 북한 경비정 684호는 포탑 파괴와 조타 기능 손상으로 전투력을 상실했고, 다른 함정의 예인을 받으며 퇴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측 피해 규모는 발표 주체에 따라 차이가 존재한다.

교전 이후 한국 해군은 전술 교전 수칙을 개편했다. 기존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5단계 절차를 단순화해 ‘경고방송 및 시위기동→경고사격→격파사격’ 3단계로 조정하고 현장 지휘관의 즉각 대응 권한을 강화했다.
또한 전투력 강화를 위해 신형 고속함 PKX 사업이 추진됐다. 이 과정에서 1번 함정에는 전사한 윤영하 소령의 이름이 붙여졌고, 이후 건조된 윤영하급 고속함에는 제2 연평해전 전사자들의 이름이 차례로 명명됐다.
이 사건 이후에도 서해를 둘러싼 남북 해상 충돌은 이어졌다. 2009년에는 대청해전이 발생했고, 2010년에는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서해 북방한계선 인근은 한동안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는 지역으로 남았다.
제2 연평해전은 이후 영화와 문학 작품으로도 재조명됐다. 영화 ‘연평해전’(2015)은 당시 교전을 바탕으로 제작됐으며, 실제 전투 장면과 인물들이 재현되면서 대중적 관심을 끌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군사 충돌을 넘어 한반도 서해 긴장의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