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삼성전자·SK하이닉스에 “5년치 전기요금(25조원) 미리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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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요금 지금 끌어와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망에 투자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앞으로 5년 치 전기요금 25조원을 미리 내달라고 제안하고 금리 등 세부 조건을 협의 중인 것으로 2일 확인됐다고 조선일보가 3일 보도했다.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모습(왼쪽)과 경기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 뉴스1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모습(왼쪽)과 경기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 뉴스1

보도에 따르면 미래에 받을 전기요금을 지금 끌어와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망 건설에 투자하겠다는 구상이다. 부채가 210조원을 넘는 한전은 한전채 발행을 늘리지 않고도 투자 재원을 확보하고, 두 회사는 신규 공장에 필요한 전력을 제때 공급받으면서 국고채보다 높은 이자를 받는 구조다.

조선일보가 입수한 한전 내부 문건에 따르면, 한전은 최근 삼성전자에 20조원, SK하이닉스에 5조원의 전기요금 선납을 제안했다. 지난해 두 회사가 낸 전기요금을 기준으로 2027년부터 2031년까지 5년 치를 산정한 금액이다. 지난해 전기요금은 삼성전자가 4조1000억원, SK하이닉스가 9000억원이었다.

두 회사가 약 12개월에 걸쳐 월 2조원가량씩 나눠 내면, 한전은 선납금에서 매달 전기요금을 차감하고 남은 잔액에 대한 이자를 6개월마다 지급하는 방식이다. 이자는 현금 대신 전기요금에서 깎아주는 방안이 거론된다.

이번 제안은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등 '3대 메가 프로젝트'와 맞물려 있다는 게 조선일보의 설명이다.

한전은 정부와 사전 교감을 거쳐 메가 프로젝트 발표 나흘 뒤인 7월 3일 재정경제부·삼성전자·SK하이닉스 측과 면담했고, 7월 9일 양사에 제안서를 전달했다. 7월 31일에는 김동철 한전 사장이 김용관 삼성전자 DS부문 경영전략담당 사장을 직접 만나 선납제와 반도체 전력망 건설을 협의했다. 비슷한 시기 청와대에도 이 방안이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8월 11일에는 양사 실무진이 선납 규모와 이자율 등 세부 조건을 논의했다.

한전이 이례적인 제안에 나선 것은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데도 대규모 부채 탓에 전력망 건설에 속도를 내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조선일보는 전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각각 추진하는 용인·호남 클러스터에 전력이 제때 공급될 가능성이 커지는 만큼 제안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 뉴스1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 뉴스1


한전은 삼성전자에 국고채 2년물보다 높고 한전채 2년물보다는 낮거나 비슷한 수준의 이자율을 제시했다. 국고채의 경우 2년물 금리보다 0.15%포인트 높은 이자율을 보장해주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SK하이닉스도 삼성전자와 같은 조건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매체에 따르면 선납금은 호남권과 용인 반도체 산업단지에 전기를 공급할 송·변전망 건설에 우선 투입된다. 한전은 당초 2038년까지 전력망에 72조8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3대 메가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투자 규모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용인 클러스터 조기 준공과 호남권 클러스터 신설에 따른 반도체 추가 수요만 20.6GW, 권역별 AI 데이터센터 수요는 7.9GW에 달한다.

한전 고객은 선수금 명목으로 요금을 미리 내고 정기예금 수준의 이자를 받을 수 있다. 한전은 납부 편의를 위한 이 제도를 대규모 자금 조달 수단으로 바꾸기 위해 별도의 '대규모 전기요금 선납 특례'를 신설할 계획이다.

박창률 한전 기획처장은 전날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선납제는 한전에는 새로운 재원 조달 수단이 되고, 기업은 대규모 공장 건설에 필요한 전력망 구축 지연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박 처장은 기업으로서는 여유 자금을 안정적으로 운용할 투자처를 찾는 셈이라고 말했다.

한전이 이 같은 제도를 추진하는 또 다른 배경은 내년 말 닥칠 '한전채 발행 절벽'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면서 한전의 부채는 올해 6월 말 기준 210조7000억원까지 불어났다. 이자 비용만 하루 115억원이다.
경기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 뉴스1
경기 이천시 SK하이닉스 본사 / 뉴스1

정부는 한전을 지원하기 위해 사채 발행 한도를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2배에서 한시적으로 완화했다. 그러나 이 특례가 2027년 말 종료돼 2028년부터 한도가 다시 2배로 줄어든다.

한전은 선납금 25조원으로 신규 한전채 발행을 대신하면 줄어드는 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한전채 발행이 줄면 신용도가 높은 한전채로 시중 자금이 쏠려 중소·중견기업의 회사채 발행이 어려워지는 부작용과 전기요금 인상 압력도 낮출 수 있다는 것이 한전의 설명이다.

이번 제안의 배경이 된 '3대 메가 프로젝트'는 이재명 정부가 반도체와 AI 산업 육성을 위해 추진하는 핵심 국정 과제다. 용인·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와 권역별 AI 데이터센터 구축이 그 골자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경기 용인 일대에 조성되는 대규모 첨단 산업단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생산 시설 투자를 추진하고 있으며, 정부는 이 단지의 조기 준공을 목표로 삼고 있다. 클러스터가 본격 가동되면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 만큼 안정적인 전력망 확보가 관건으로 꼽힌다.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는 기존 수도권 중심의 반도체 생산 기반을 지방으로 확장하는 구상이다. 신규 클러스터가 들어서면 추가 전력 수요가 발생하기 때문에 송·변전망 신설이 뒤따라야 한다. 용인 클러스터 조기 준공과 호남권 클러스터 신설로 늘어나는 반도체 전력 수요만 20.6GW에 이른다.

AI 데이터센터는 대규모 연산을 처리하는 시설로, 전력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것이 특징이다. 정부는 권역별로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한다는 방침인데, 여기서 발생하는 전력 수요만 7.9GW로 추산된다.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를 합치면 전력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구조여서, 전력망 건설이 이들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를 변수로 지목된다.

문제는 재원이다. 한전은 당초 2038년까지 전력망에 72조8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지만, 3대 메가 프로젝트가 더해지면서 투자 규모를 늘려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210조원이 넘는 부채를 안고 있는 한전으로서는 한전채 발행에만 기대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번 전기요금 선납 제안이 이런 배경에서 나온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