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들)’ 제작진, 실제로 명예훼손 처벌받을 수 있을까…법조계 의견 물어봤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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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도 명예훼손 처벌 가능한가, 형사와 민사의 갈림길
역사 왜곡 논란 끝에 고발당한 영화 ‘암살자(들)’ 제작진이 형사처벌을 받을 가능성은 낮다는 게 법조계의 중론이다. 영화가 창작물이라는 점이 핵심 이유다. 다만 박정희 전 대통령 유족이 사자명예훼손을 문제 삼아 민사소송을 제기한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고발 접수 경위와 쟁점
최근 이종배 국민의힘 전 서울시의원은 제작진을 유족에 대한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검사 출신인 국민의힘 주지우 의원도 "사자명예훼손죄에 명백히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가세했다.
논란의 출발점은 영화가 다룬 소재다.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겨냥해 쏜 총에 육영수 여사가 숨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극 중 일부 인물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 측 또는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계획했을 수 있다는 가설을 입에 올린다. 일각에서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이 나온 대목이 바로 이 장면이다.
형사처벌이 성립하려면
형사처벌이 가능하려면 세 가지 요건이 모두 충족돼야 한다. 단순한 의견 표명이 아닌 구체적인 허위 ‘사실’이 적시돼야 하고, 허위임을 알면서도 적시했다는 고의가 있어야 하며, 그로 인해 박 전 대통령 또는 유족의 명예가 훼손됐다는 점까지 입증돼야 한다. 사자명예훼손죄는 형법 제308조에 규정돼 있고, 허위의 사실을 공연히 적시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법조계는 첫 번째 요건에서부터 걸림돌이 있다고 본다. 언론 보도나 다큐멘터리가 아닌 창작물의 내용이 허위사실 적시로 분류될 가능성 자체가 낮다는 것이다. ‘암살자(들)’은 도입부에 "등장인물과 구체적 사건은 일부 각색됐다"는 안내 문구를 넣어 픽션임을 분명히 했다.
법률사무소 태연의 김태연 변호사는 영화가 허위사실을 적시했는지 가르는 기준은 결국 관람객의 ‘인식’이라고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대다수 관객은 이 영화가 픽션임을 인지할 것"이라며 "창작물을 사실 적시로 보긴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관객이 극 중 장면을 사실의 보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허위사실 적시라는 전제가 흔들린다는 논리다.

유족이 고소하지 않으면 수사도 불가능
절차상의 장벽도 있다. 사자명예훼손죄는 고인의 유족이 직접 고소해야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다. 따라서 박 전 대통령 유족이 고소하지 않으면 수사 자체가 진행될 수 없다. 제3자의 고발은 수사의 단서가 될 수는 있어도, 고소권자인 유족의 고소를 대신하지는 못한다.
법원이 선을 그은 전례, KBS ‘서울 1945’
창작물 내용을 이유로 제작자가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처벌받은 사례는 찾기 쉽지 않다. 대표적인 판례가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다.
2006년 이 드라마의 제작진은 고(故) 이승만 전 대통령 등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2010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문제가 된 장면은 고(故) 장택상 전 국무총리가 이 전 대통령에게 ‘친일경찰’ 박모씨를 "사건 해결의 최대 공로자입니다"라고 소개하는 대목이다.

검찰은 이 장면이 두 사람을 친일파로 묘사하면서, 공산당 지폐위조 사건인 ‘정판사 사건’을 경찰을 동원해 해결한 것처럼 그렸다고 보고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했다. 그러나 법원은 해당 장면이 드라마의 특정 장면에 불과해 이 전 대통령의 친일 행위가 구체적으로 적시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실존 인물에 의한 역사적 사실보다 가상 인물에 의한 허구의 사실이 더 많은 드라마라는 점을 인정하며 구체적인 허위사실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시했다.
민사소송은 이야기가 다르다
일각에서는 박 전 대통령 유족이 제작진을 상대로 명예훼손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할 경우 청구가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지 않다는 의견이 나온다. 엄격한 증명을 전제로 하는 형사 사건과 달리 민사소송에서는 입증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하기 때문이다. 형사재판에서는 유죄를 확신할 만한 증명이 요구되지만, 민사재판에서는 그보다 낮은 수준의 증명으로도 판단이 가능하다.
곽준호 법무법인 청 변호사는 영화의 내용을 문제 삼았다. 곽 변호사는 해당 내용이 박 전 대통령이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정국 전환용으로 육 여사를 암살하려 했음을 암시한다며 "인륜에 반하는 극단적인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어 "인격에 관한 부분이기 때문에 유족이 소송을 내면 명예훼손이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유족이 승소한 전례, ‘그때 그 사람들’
유족의 민사소송 선례도 있다. 10·26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 제작사를 상대로 박 전 대통령의 장남 박지만씨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2006년 1심 재판부는 1억원 배상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박씨가 아버지에 대해 지니는 경애와 추모의 감정이 영화로 인해 침해됐다는 주장을 받아들였다. 사자명예훼손 형사 사건이 아니라 유족 본인의 감정 침해를 근거로 한 민사 판단이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소송은 2008년 항소심에서 양측이 재판부의 조정안을 받아들이면서 종결됐다.
형사와 민사의 갈림길
정리하면 형사 사건은 허위 ‘사실’의 적시, 고의, 명예훼손 입증이라는 세 요건에 더해 유족의 고소라는 절차 요건까지 갖춰야 한다. 도입부에 각색 사실을 밝힌 픽션이라는 점은 형사 사건에서 제작진에게 유리한 사정이다. 민사 사건은 유족이 소송을 내야 시작되며, 입증 부담이 덜한 만큼 영화 속 가설이 유족의 인격을 침해했는지가 판단 대상이 된다. 두 절차의 결과가 엇갈릴 수 있다는 점은 ‘서울 1945’의 무죄 확정과 ‘그때 그 사람들’ 1심의 배상 판결이 각각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