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으로 별세… 한국 영화사 호령한 故 신성일 '8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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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 투병 끝 별세 후 8년… 여전히 기억되는 한국 영화 전설
한국 영화계를 상징하는 거대한 별, 배우 고 신성일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8년이 흘렀다.

고인은 2018년 11월 4일 폐암 투병 끝에 향년 81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2017년 폐암 3기 판정을 받고 힘겨운 항암 치료를 이어갔으나 끝내 병세가 악화되면서 전남 화순의 한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고인은 투병 중이던 2017년 10월에도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해 회고전과 레드카펫을 밟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태웠다.
1937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난 고인은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은막에 데뷔했다. 이후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 '겨울 여자' 등 무수한 명작을 남기며 1960~70년대를 풍미한 당대 최고의 미남 스타이자 흥행 보증수표로 자리매김했다. 조각 같은 외모로 '한국의 알랭 들롱'이라 불렸던 그는 2000년대의 시각으로 바라봐도 걸출한 외모와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다. 데뷔작을 통해 인연을 맺은 동료 배우 엄앵란과 1964년 세기의 결혼식을 올렸으며 두 사람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신성일의 전성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루를 넷으로 나눠 4편의 영화를 겹치기로 촬영할 정도였으며 평생 출연한 영화만 524편(추정)에 달한다. 이 중 54편을 아내 엄앵란과 함께했다. 당대 다른 배우들의 출연료가 약 1만 8000원이던 시절, 신성일 홀로 45만 원을 받아 2위와 7배의 격차를 벌렸고 제작사들이 현금을 자루째 들고 집 앞에 줄을 서기도 했다. 당시 영화 OST를 전담했던 가수 현미, 최희준과 함께 전국 각지의 극장 쇼 무대에 서며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비록 벌어들인 돈을 선거 출마와 필름 국산화 사업 실패 등으로 모두 소진해 막대한 빚을 지기도 했으나 영화계 내 그의 독보적인 위상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신일룡, 신영일, 한지일 등 수많은 후배 배우들이 그의 이름과 이미지를 모방하거나 차용했을 정도로 시대적 파급력이 컸다.
사투리가 심했던 탓에 1960년대 성우 이창환, 1970~80년대 성우 이강식의 더빙을 거쳐야 했고 이에 따라 후시녹음 수혜자라는 시선과 함께 연기력에 대한 엇갈린 평가도 공존한다. 그러나 방대한 다작 속에서도 고른 연기력을 유지하며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견인했고 '길소뜸', '이상의 날개', '코리언 커넥션', '증발' 등 동시녹음 및 본인 음성 출연작을 통해서도 유력 시상식의 트로피를 거머쥐며 거장의 묵직함을 입증했다. 2010년 제47회 대종상 영화제 공로상을 비롯해 수많은 훈장을 품에 안았다.

신성일은 은막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제11대 총선 출마 당시 유권자들이 본명 강신영을 알아보지 못해 낙선하자 법적 본명을 '강신성일'로 개명했고 훗날 제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서도 활동했다. 전성기 시절 철저히 거리를 뒀던 브라운관에도 진출해 드라마 '여자의 남자', '딸부잣집'을 비롯해 말년에는 예능 프로그램 '세바퀴', '노코멘트'에 출연하며 대중과 소통을 이어갔다.
파란만장했던 삶의 궤적만큼 세대 간 평가가 나뉘기도 하지만, 한국 영화사 100년을 통틀어 신성일이라는 이름 석 자가 남긴 기록과 스타성에 이견을 다는 이는 없다. 스크린 위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고 신성일, 그가 남긴 500여 편의 필름은 8주기를 맞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국 영화의 위대한 역사로 남아 숨 쉬고 있다.